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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내 방 하나 - 손 닿는 만큼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들
권성민 지음 / 해냄 / 2020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딱히 정의 내리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어른이구나 구체적으로 느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냥 나이가 들었을 뿐. 책을 읽으며 문득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생각했던 어른의 모습을 현재 나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어른이면 대단해지는 줄 알았으니까. 막상 나이가 들어보니 특별난 건 없다. 스스로 결정하는 일은 즐거울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많다. 여전히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도 많고.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이 습관처럼 흘러갈 뿐이다.
그 사이 경험치만큼 단단해지며 찾아온 마음의 평온이 '그래 잘 살아왔다'는 상이라면 상이라고 생각했다.

표지 속 뒷모습을 보고 당연히 여자인 줄 알았다. 하다못해 정면으로 찍은 프로필 사진에서조차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보다 갸름한 얼굴선을 가지고 찰랑찰랑 한 웨이브 헤어스타일이었다.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하고 한참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이 점점 정리되기 시작하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을 때쯤,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를 가졌다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나 자신과 타인을 향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 그는 어른 같다.

중학교 이후 독립해 자신의 능력치 끌어올리며 '자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팔도 펴기 힘든 비좁은 고시원 월세에서 원룸으로 투룸으로 MBC PD가 되어 전세로 옮길 때까지 그의 삶은 숨 쉴 틈 없는 전력 질주 같다. 그렇다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묵묵히 제 갈 길을 나아갈 뿐이었다.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단단함과 위트는 그렇게 그의 삶에서 뿜어져 나왔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삶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어른이구나. 나는 얼마나 어른에 가까워졌을까.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보통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었는데 어른은 나보다 그가 먼저인 것 같다.

'겪어보니 별거 아니더라.'
그렇다고 경험만 두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촉을 세워 알아차림,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게 많이 빠졌다.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대로 생각하는, 그 차이가 언어의 차이가 된다는 것이 새삼 와닿는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그의 태도가 그의 언어로 전해져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한 발자국 떨어져 나를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싶다.
그가 처음 단독으로 연출했다는 <가시나들>.
본 적은 없지만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는 타이틀과 나이차를 뛰어넘는 연대를 그리는 소재가 푸근하다.
예능은 유행만 좇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PD)과 닮아 있었구나, 처음 느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적 좋은 아들이 만화에 빠져 있을 때 훈계보다 말없이 내민 두 권의 만화 작법책이 인상 깊다.
'홀로 단단하게 설 수 있으려면 역설적이지만 넉넉하게 품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라는 그의 말에서 부모로서의 나의 모습도 짚어본다.
144. 우리는 모두 발 디딘 곳에서 분투하며 살아가고, 힘이 닿는 데까지는 앞으로도 그럴 거다. 여기쯤이 내 자리구나, 깨닫는 것은 너무 일찍 다리가 풀려 주저앉지 않도록 적당히 오래오래 분투하기 위해 디딜 곳을 찾았다는 말일 것이다. 적당히.
206. 이 떨림은 불안이 아니라 설렘일 거라고.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생의 감각이라고. 해보면 별거 아니더라고. 그게 무대가 나에게 준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다. 활성화된 교감신경계는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
226. 그래. 희망은 배우는 것이다.
265. 나도 꼰대 말고 저 이름을 가져야 할 텐데, 좋은 어른.
그의 지혜와 통찰, 단단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언어가 많은 이들의 홀로서기를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