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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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썼다. 그의 어머니를 모델로 썼다. 는 이야기만으로도 너무나 호기심이 이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타이틀을 넘는 무언가의 내용이 있었다. 전쟁이 개인에게 직간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청춘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인생 그대로를 안아주고싶은 어떤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손녀 에텔. 좋은 집안에서 자란 그녀가 동경하는 러시아 출신 친구는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고, 세파에 찌들어버린 아름다운 소녀다. 따뜻한 집과, 화려한 옷이 있던 시절의 어린 에텔은 그 친구를 동경하고 사랑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집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연보라색 유년시절은 작게는 아버지에 의해, 크게는 전쟁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어버리고 만다. 감성이 예민했던 그녀의 귀에 들어오는 살롱의 의미 없는 대화들. 현실적이지 않고, 말뿐이며, 허기라고는 몰라서 기억할 것이 없는 대화들을 그녀는 기록한다. 그녀가 커갈수록 그 기록은 선연히 분노의 색채를 띤다. 

그리고 이제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무기력한 부모를 짐처럼 가진 그녀의 선택은 바로 ’모든 것을 똑바로 주시하는 것’이다. 때로 부모의 못난 점에 화가 치밀어 따가운 말을 뱉고, 시니컬하게 응대하지만, 그럼에도 먹고 살기 위해 다 시들고 곰팡이핀 채소를 얻으러 다니고, 짐을 싸고, 운전을 한다. 어느 순간 부모에 대한 연민에, 다시 생(生)을 끌어안고 마는 것이다.

그녀를 이해하는 남자를 사랑하고, 바다에서 헤엄치는 그녀의 모습은 세계에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는듯 하다. 이전의 온실 속 화초와 다른 모습. 세계를 담아내고 이해하는 그녀의 모습. 책에는 그 애틋하지만 멋진 성장기가 오롯이 담겨있다.

특히 아버지의 내연녀였던 모드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의연한 ’여성’의 모습이다. 끝내 아버지와의 일은 묻지 않지만 그녀라는 인간 자체의 삶을 나름대로 반추해보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녀의 화려했던 시절과, 그 때의 생각과, 그리고 지금 그녀의 초라한 모습. 모드의 인생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에텔은 더이상 어린 여자아이가 아닌 것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저 다치거나 죽는 차원이 아니었다. 미시적이지만 송두리째 한 일가의 생활을 바꿔놓은 전쟁. 어떻게 보면 그건 거대한 성장통이었는지도 모른다. 

행복하다면 그건 기억할 것이 없는 것이다. 허기 특유의 간절함은 특별한 기억과 계기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긍정하는 힘이며, 다음 시간을 살게 하는 힘이다. 

작은 소녀가 바람구두를 신은 여인으로 성장하기까지. 메마르고 간절한 허기의 간주곡이 머리 속에서 계속해서 울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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