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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1호 - 창간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다른 곳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갔던 31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병들은 성경 이외에 다른 책을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덕분에 사회에서는 엄두도 못내던 4대복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평소에 습관적으로 활자를 읽어나가는 내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 당시 신교대 막사는 리모델링 중이라 컨테이너 막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공간이 없어서인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뜬금없는 물건들이 짱박혀있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이발소에 수납장에 무질서하게 꽂혀 있던 책들이었다.
고작 5주의 훈련기간에도 우리는 머리를 두어 번 깎았어야 했었다. 책에 굶주려 있던 나는 머리 깎는 걸 기다리는 척하며 조교가 오지 않을 때마다 책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언제 조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편소설을 읽을 수도 없었고, 아니면 그런 책을 읽느니 차라리 닳고 닳은 국방일보를 다시 보는 편을 선택할 신앙서적이나 정훈도서들 사이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계간 판타스틱」이라는 잡지였다. 아마 2009년 여름호인가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사회에서는 그런 잡지가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책을 훑어보다가 중세유럽문학 전공자가 쓴 아더왕 전설의 변천에 대한 전문적이면서도 웃긴 에세이를 허겁지겁 읽었고, 중세중국문학의 사후세계였나?의 주제를 다룬 글을 읽으려다가 조교가 들어와서 못 읽었던 기억이 난다. 퀴퀴한 컨테이너 이발소에서 각개전투를 앞둔 머리 빡빡 민 훈련병이 읽기에는 정말 뜬금없는 내용이었음에도 너무나 즐겁게 흡수하듯이 읽어댔다. 그날 밤 자기 전에 글 읽기가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구나하고 감탄했었다.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첫 휴가 때 부대에 사 가고 싶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폐간된지 꽤 됐던 상태였었다. 허탈했었다. 군생활 하면서 부대에 들어오는 이런저런 잡지에 취미를 붙였었던 터라 계간 판타스틱 같은 장르문학 잡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페북에서 미스터리문학 잡지가 발간되어 창간호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 번 사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설이 길었던 것은 잡지를 주문해놓고 기다리면서 훈련소의 풍경이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어서 막상 본 잡지에 대해서 쓸 힘이 떨어진 가운데... 잡지는 앞 부분의 서평, 칼럼, 대담 등등과 뒷부분의 단편소설들로 나뉘어 있다. 신간 소개가 많은 점은 미스터리 문학 부흥의 견인차가 되겟다! 하는 강한 의지의 표현 같았다. 미스터리의 고전에 대한 소개도 있으면 좋겠다. 법의학자의 논픽션이 앞 부분에서는 가장 인상 깊었다. 미스터리 소설과 범죄 소설을 통해 정말 끔찍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창작되고 잇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도 소설보다 더 끔찍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리소설의 효시라는 모르그가의 살인사건도 실제 사건에서 따왔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특히)
한국 작가들의 미스터리 소설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던 터라 기대하며 읽었던 뒷부분은 생각보단 별로였다. <배신의 별>은 난해하기는 했지만 어떤 대륙인지 특정할 수 없는 항구도시의 분위기와 내용이 잘 어우러져서 좋았다. 다만 장편소설의 한 챕터인 것 같은 뭔가 찜찜한 느낌이 아쉬웠다. <누구의 돌>은 전개가 대충 뻔하기는 했지만 단편소설로 시작과 끝이 딱 떨어지는 점(잘 표현을 못하겠다)과 오디션 프로그램이 낳은 반짝스타 가수 같은 요소에서 느껴지는 '아 이게 진짜 동시대의 한국 소설이구나 싶은 점이 좋았다. 현직 판사로 유명한 도진기 작가의 <구석의 노인>은 솔직히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단편이 재미가 없어서 이 작가의 장편을 읽어봐야 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p.s.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계간 미스터리」라는 잡지가 2002년부터 간행되고 있었다는 것 알게 됐다. 내가 필요한 것들은 사실 세상에 다 있는데 내가 무지한 것 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