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생명이 만개했던 봄이 장마에 한 풀 꺾였다. 비는 여름의 시작을 알렸고, 저마다 쏟아질 더위를 대비해 나름의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교복은 한 겹씩 떨어져서 어느덧 순식간에 하복 철이 되었다. 그동안 묵어있던 선풍기의 먼지를 닦을 사람은 지각한 아이가 벌청소를 겸해 맡게 되고, 에어컨 필터의 먼지도 털었다. 준비는 만반이지만 정작 선생님들은 아직 냉방기구를 틀 정도로는 덥지 않다며 전원을 올려주지 않는다. 교무실은 어차피 시원하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라며, 열심히 준비했던 아이들은 실망한 투로 불평을 뱉는다. 하복 셔츠를 펄럭이며 연신 부채질도 멈추지 않는다. 물총은 또 언제 챙겨온건지 장소 대상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쏘아지는 물줄기에 바닥은 흥건하다. 더워서 쌓인 스트레스를 소리치는건지, 아니면 더위 그 자체를 표현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이미 여름이다.
그 탓일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잠들었을 새벽은 습해진 공기에 목이 메여서 깊이 잠들지 못하는 시간으로 돌변했다. 분명 잠에 취해서 누웠을텐데 깨어버린 새벽은 어쩐지 평소보다, 심지어 낮보다 선명한 것이 다시 잠들기는 힘들 정도로 또렷하다. 괜히 애꿎은 베개에 머리를 묻고, 여기저기 구르다가 똑바로 덮었던 이불을 발 밑으로 차버리기 일쑤다. 아무리 이불을 던지고 있는 그대로 몸만 누워도 공기는 텁텁하다. 이대로 다시 잠들지 못한다면 분명 피곤할 내일의 몸을 생각하니 여간 억울한게 아닌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새벽이니 새벽감성까지 물밀듯 몰려온다. 이런 걸 기억하고 있었나? 싶은 것들까지 온통 저 구석에서 몰려와 전신을 덮친다. 그땐 이랬지, 이때는 또 이랬구나. 대체 왜 그랬을까. 같은, 밀려오는 온갖 감정에는 이름을 모를 복잡함도 있겠지만 그리움도 추억도 분명히 존재한다.
여름과 여름의 새벽은 꼭꼭 숨어있던 내 '오카자키'를 불러내주는 하나의 신호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는 새벽이 끌어다 준 오카자키인 것처럼, 무언가를 계기로 해서 잊고 있던 옛날의 추억을 종종 떠올려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소중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이 지워졌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나도 모르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옛 기억이다. 지워지지 않은 채로, 다만 그 위로 수어겹 쌓아올린 다른 소중함에 가려져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결코 소중함과 중요함을 잃은 덩어리는 아니다. 옛 추억은 언제나 저 밑 한켠에서 다시 떠오를 계기를 기다린다. 그 계기가 이 책이 된다면 분명 작가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고. 어쩌다 어른이 되어 방황하고 헤메이는 서툰 우리가 다른 의미로 서툴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좀 더 힘을 내고 어른을 마주보아, 끝내는 어쩌다 된 어른이 아닌 성장한 어른으로서의 재시작점을 잡을 수 있다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설령 계기가 있다고 해도 떠올라줄 오카자키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여전히 머물러주는 내 오카자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