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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ㅣ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야생의 심장 가까이_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당장 손에 쥐고 읽지 않더라도 소유하고 싶은 책들이 있다. 나에게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그러한 작가이다. 이미 봄날의 책에서 여러번 소개한 그녀의 책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선뜻 꺼내어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단의 충격을 준 대단한 작가이지만 동시에 직관적인 이해에 난해함을 선사하는 작가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형식의 서술법. 나에게 대단하지만 어려운 작가로 느껴지는 그녀의 첫 번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용기가 생겼다. 이 작품이 그녀의 시작이자 끝이 될 것이라는 소개의 글이 그 첫번째. 그리고 이해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편집자님의 편지에서 그 두번째 힘을 얻었다. 그녀의 문장과 글을 통해 마음껏 그녀의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토록 겁내하던 것이 아쉽고 우습게 여겨질정도로.
그녀의 모든 문장과 의도를 이해하며 읽었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나는 그녀의 문장 속에 내 마음에 와 닿는 그것을 발견했으며,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뿐이다. 그리고 그것에대해 나는 진심으로 만족한다. 작품 속 마지막 2부의 여행이라는 제목을 끝으로 기나긴 시를 읽은 듯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제목으로 다시 돌아와 야생의 심장 가까운 그녀의 문장을 떠올려본다.
✏️연민은 내 방식의 사랑이다. 내 방식의 증오이고, 소통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으로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살아가듯, 세상 속의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연민이다.
✏️밤이 왔고, 그녀는 계속해서 척박한 리듬으로 숨 쉬었다. 그러나 동트기 전의 빛이 침실을 부드럽게 밝히자 물체들이 그림자 속에서 새롭게 등장했고, 그녀는 새 아침이 시트 사이로 살며시 파고드는 걸 느기며 눈을 떴다.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마치 그녀 안에서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사랑이 그녀를 하나로 이어붙일 수 있으리라는 듯이, 영원이 다시금 재개되리라는 듯이.
✏️팔을 내린 그녀는 다시금, 하얗고 안전하게, 응축한다.
✏️아직 형용사가 없는 움직임들. (...) 새벽과 강렬한 낮과 밤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음표가 되어 그 교향곡 안에서 살아간다. 변형이라는 교향곡.
✏️이 곡은 푸른 장미 같아,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자기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넓고 위험이 없는 맨 아래 계단에 멈추어, 반들거리는 차가운 난간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그리고 이유 모를 갑작스런 행복감을 느꼈다. 거의 고통스럽기까지 한 그 행복감은 심장에 나른함을 가져다 주었다. 마치 그녀의 심장이 밀가루 반죽이고 누군가 거기 손가락을 박고서 부드럽게 치대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예리하게 자신을 살폈다. 이 살아 있는 존재는 그녀의 것이었다.
✏️주아나는 세상에서 낙오하면서 홀로 남은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아무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랑은 아닌 것, 그들은 늘 그녀에게 다른 감정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설명할 수가 없다. 사물들이 정해진 형태와 경계를 갖고 있으며 모든 것들이 확고하고 바뀌지 않는 이름을 지닌 지역, 그녀는 그곳을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자신에게 순응하는 것뿐이므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아무것도 나의 길을 막지 않을 것이며, 부투할 때나 쉴 때나 나는 어린 말처럼 강하고 아름답게 솟아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