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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 ㅣ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점보기로 빌딩을 들이받은 알 카에다의 자살특공대, 일부 사람들의 눈에 이 행위는 테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이를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9.11 사태를 '테러'라 칭하는 사람이건 '성전'이라 칭하는 사람이건 간에 양쪽 인물들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저마다 다 하나의 강력한 신념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자신과 전혀 다른 타인을 마치 한 몸처럼 이어주는 정신적 신념,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전염성 강한 이 문화적 신념을 밈(Meme)이라 칭했다. 인류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밈을 들라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종교를 말할 수 있겠으나, 이 종교를 능가하는 인간의 신념으로 이데올로기가 있다.
태백산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 대립을 그 배경으로 하고있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강력한 정신적, 문화적 신념에 휩싸여있거나 그 가장자리를 배회한다. 사회주의 이상향을 꿈꾸는 정열의 염상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김범우, 공산당이라면 이를 가는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 등은 이데올로기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친구, 형제간에도 총부리를 겨누고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다. 민초들의 해방을 위해 공산당에 투신한 하대치는 신념의 화신 그 자체이고, 정하섭이라는 남자의 그림자만을 쫓다보니 어느새 빨치산이 되어있는 무당 소화의 신념은 사랑이다.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지주계급 역시도 과거 유교사상에 입각한 나름의 신념이 있다. 양반은 양반, 상것은 상것, 각자의 본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정도랄까. 피해자로 설정되어 있는 소작농에 반하는 지주들의 이러한 신념은 다분히 자기합리화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림의 태생적 토양을 생각할 때 뿌리부터 전제적인 지주들의 사상은 그들로선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이렇듯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엔 백치가 없다. 각계각층,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저마다 다 나름의 신념과 의지에 휩싸여있고 그들의 언행에선 힘이 넘쳐흐른다. 역사의식이 투철한 이 소설의 힘은 저 개성 강한 캐릭터들에서 기인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태백산맥에는 유달리 자기만의 신념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한반도는 온갖 인간군상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던 혼돈의 땅이었다. 침략과도 같은 강대국들의 간섭에 시달리고, 새로이 고개를 들기시작하는 이데올로기의 실험장이 되어야했으며,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기존의 사회구조를 사수하려는 기득권자와 이를 전복시키려는 소외계층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런 혼탁한 시대상황 속에 내던져진 인간이 그 어떠한 심경의 변화도 없이 고요하기만을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붕어가 탁류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탁류에 걸맞는 연어로 변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저마다 피눈물나는 기구한 사연 속에서 마지막 구원과도 같은 신념 하나 품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민초들의 이야기가 태백산맥에 녹아있다.
이 소설을 읽어봐라. 그럼 비행기로 빌딩과 헤딩을 할 정도로 자신만의 신념에 찬 자살특공대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