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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차창에서
호시노 겐 지음, 전경아 옮김 / 민음사 / 2020년 3월
평점 :
눈부시도록 밝고 착한 이에게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다. 나는 이렇게나 꼬여있는데 당신은 참으로 해맑구나. 당신의 삶에도 과연 시련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이런저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명백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도 긍정적인 감정만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호시노 겐의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그 다정함과 따뜻함에는 거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다는 그 사실이 신기했다. 필자의 인격적 성숙이 그새 이뤄졌을 리는 만무하니, 결국 그건 작가의 힘이겠지.
[생명의 차창에서]는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 작가인 호시노 겐의 에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품 전반에는 호시노 겐 특유의 다정함이 깔려 있다. 모든 이야기가 말랑하게, 부드럽게 읽힌다. 하지만 이 책은 평화롭고 즐거운 내용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입부터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지주막하출혈이라는 질병으로 머리를 여는 대수술을 받았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도 흉터와 상처 자국이 느껴진다는 이야기. 이런 내용조차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작가의 표현 방식 덕이다. 수술 때문에 생긴 머리 쪽 흉터에는 지금도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면 꽤 재미있을 거라든가, 이마에 난 상처 속에 조그마한 자기 자신이 들어가 몸이라는 탈것을 조종하고 있는 느낌이라든가 하는 표현들. 빈말로도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심각한 일을 그는 가볍게 털어낸다.
물론 부정적인 내용을 한결같이 재치있게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때론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분노에 싸여 제법 잔혹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해내는 이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했던 ‘좋은 사람에게 느껴지는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긍정적인 이야기를 담은 부분은 반대로 한결같이 표현되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어떤 부분이 어떻게 훌륭한지 최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어느 것 하나 그냥 흘려버리지 않은 채로. 그렇기에 그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찬사에는 진정성이 가득 느껴진다.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적당히 정중한 빈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런 진심어린 칭찬은 새삼 귀하다.
호시노 겐의 에세이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단순히 이 책을 재밌게 읽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호시노 겐이라는 작가에 대해 인간적 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그의 저서가 [생명의 차창에서]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정도였다. (호시노 겐의 저서는 일본 현지에서는 총 9권이 출판된 바 있다.)
아쉬운 점은, 본문에 포함된 옮긴이 주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작가의 본업이 가수, 배우이기 때문에 이 책에는 그의 동료 연예인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그 동료 연예인들에 대한 설명이 아주 조금만 더 구체적이었다면 읽는 이에게 좀 더 재미를 줄 수 있었으리라고 느꼈다. 예를 들면 초반에 등장하는 ‘후루타 아라타‘의 경우 호시노 겐의 대표작인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 함께 출연한 배우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면 더 읽는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국내에서 번역 출판하기로 결정했을 때 예상 독자는 분명 연예인 호시노 겐의 팬들로 설정되었을 텐데, 팬들이 읽었을 때 흥미롭다고 느낄 법한 요소를 좀 더 추가했다면 좋았겠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고 좋았지만 굳이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일본식 영어를 그대로 발음만 음차해서 옮겨놓는 경향이 약간 강하게 느껴지는 게 아쉬웠다. 예를 들면 자몽을 ‘그레이프프루트’라고 번역한 부분. 일본에서는 grapefruit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자몽이라고 부르는데, 그걸 그대로 그레이프프루트로 옮겨놓은 것은 자료조사가 부족했지 않나 싶다.
에세이는 소설에 비해 더 직접적으로 작가를 드러낸다. [생명의 차창에서]에 드러난 작가 호시노 겐, 좋다. 그의 책이 한국어로 더 번역 출판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