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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ㅣ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센터 문학총서 3
노나카 히라기 지음, 정향재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노나카 히라기의 『연인들』에서 우리는 두 커플을 만날 수 있다.
살아온 세월만큼 여유가 느껴지는 '오누키'와 그의 젊은 연인 '아야카' 커플,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매력적인 여인 '마이코'와 그녀의 곁에 늘 함께하는 친구이자 연인인 '교이치' 커플...
작가는 이 두 커플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하는 것일까…….
오누키와 아야카는 내가 보기에도 '이 둘은 서로 정말 사랑하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뚜렷이 답할 수 없는 커플이다.
이십대 중반의 아야카와 그녀보다 무려 열다섯 살 연상의 오누키는 함께 살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쿨하고 자유로운 커플이랄까? 오누키는 언제든 그녀가 자신 곁을 떠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고 아야카는 그런 오누키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더라도 별다른 질투의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아야카가 두 살 정도 되던 해에 3층 맨션 베란다에서 떨어진 이후 가끔씩 찾아오는 다리의 절룩거림처럼 아야카는 문득문득 공기의 무거움과 함께 삶에 불안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아야카 스스로는 본인과 오누키의 관계를 권태와 체념이라고 생각한다.
'체념'을 폭신한 깃털 이불로, '권태'는 사랑과 비슷한·부드럽고 기분 좋은·오래 써서 낡아빠진 담요 같은 것으로 여기고 그 깃털 이불과 담요의 조합에 만족한다.
권태와 체념의 커플임에도 불구하고 아야카는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오누키를 마중나가는 길, 불쾌하게 젖어드는 발이 상쾌함으로 바뀌어 감을 느낀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이런 아야카의 모습에서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것 같은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아야카 커플의 사랑은 어떤 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야카는 오누키와 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어떤 테이블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곳엔 한 커플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그 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끌리는 아야카.
그 여자는 실내에서도 검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다.
아야카의 시선을 따라 그 테이블에 눈을 돌린 오누키는 또 그 자리의 남자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짖는다.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바라보며 그들은 묘한 느낌을 경험한다.
그 테이블의 주인공은 시각장애인 마이코와 늘 그녀의 곁을 지키는 교이치 커플이다.
마이코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기념한 자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던 그들에게 한 여인이 다가온다. 아야카다.
그림을 그리는 아야카는 마이코에게 조심히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 부탁한다.
갑자기 다가온 아야카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교이치와 달리 마이코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야카에게서 흥미로움을 느낀다.
이렇게 그 두 커플의 인연이 시작된다.
교이치는 가끔 마이코와 자신이 고치 안에 갇혀 웅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안은 따스하고 안전하지만 가끔은 숨이 막혀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늘 마이코의 곁을 지키는 그이지만 이럴 때면 가끔 혼자 있고 싶어 거짓말도 한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이 좋다며 말을 돌리는 마이코는 그런 교이치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시력을 잃기 전 마이코는 교이치의 친한 친구와 연인사이였다.
불의의 사고는 그녀에게서 시력과 함께 사랑하는 연인까지도 그녀에게서 빼앗아갔다.
마이코의 엄마 이외에 그녀의 사고 전후의 삶을 함께 한 사람은 교이치 뿐이다.
처음엔 우정 나중엔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진행된 듯한 이 커플의 사랑은 또 어떤 색일까?
늘 그 공간, 늘 그 일상으로 심심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교이치 커플에게 어느날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바로 마이코에게 그림의 모델이 되어달라며 다가온 여인 아야카 때문이다.
아야카를 알게 된 뒤부터 점점 달라지는 마이코를 보며 교이치 또한 그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기는 듯하다.
삶에 변화를 느끼게 된 건 교이치 커플 뿐만이 아니다.
문득 찾아오는 다리의 절룩거림처럼 정체모를 삶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던 아야카는 마이코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서 차츰 안정을 느끼고 예술가로 성장해나간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교이치 커플을 만나더라도 늘 분위기를 주도하며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오누키 또한 그들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아야카가 모르는 오누키의 젊은 시절을 말이다.
이렇게 이 두 커플은 서로의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며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삶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며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인생이 180도 바뀔 만큼의 큰 변화는 아니지만 두 연인들이 우연한 만남으로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누군가의 삶에 아주 작은 영향이라도 미치며 살아왔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물론 좋은 결과로 향하는 긍정적인 영향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늘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쉽게도...
사실 두 커플이 서로 가진 상처를 극복하며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서로 크게 개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상대가 사는 '삶'이라는 잔잔한 수면 위에 아주 작은 흔들림만 주었을 뿐이다.
그 흔들림의 원인이 수면 위에 살랑이는 바람이든 흩날리는 꽃잎이든, 그 흔들림이 커지고 커져 삶을 변화시킨건 연인들 '자신'이다.
그들은 언제든 강렬한 자신만의 색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언제든 그 누군가의 색에 서서히 물들기도 할 것이다.
아야카와 교이치 커플이 서로의 잔잔한 삶에 파문을 일으켰듯, 노나카 히라기의 『연인들』역시 읽는 내내 잔잔함을 주는 책이었지만 나의 삶에 일으킨 파문은 컸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발음은 좀 이상하지만 제목을 『인연들』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소설속 주인공들도 서로 '인연'이고 내가 이 소설을 만난 것도 '인연'이라는 생각도...
가끔은 이렇게 조용한 책 한 권이 내 삶의 빛깔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책은 영원한 나의 '연인'이 된다. 그 '연인'이 좀 많아서 문제일 때도 있지만...
자신의 삶이, 자신의 사랑이 원하던 빛깔이 아니라해서 상처를 받는다던가 포기라는 것을 한다면 그것은 참 어리석음의 절정이다.
소설속에서 아야카가 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순간 세계도 아야카를 따뜻하게 품어줌을 느꼈듯, 나도 언제든 세계에 대한 감촉이 변화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슴 깊숙이 품고 살아야겠다.
그리고 아야카가 좋아한 화가 요시코씨처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강렬하게 아름다워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