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문화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6
헬무트 리처드 니버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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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미국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의 의식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뉴스가 전해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인, 나아가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한국의 보수교인까지도 집단적인 '멘붕(멘탈붕괴)' 벌어질 만한 뉴스였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쪽에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대통령을, 다른 쪽에는 동성애와 낙태는 반대하지만 이단인 몰몬교도인 상대당 후보를 놓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것이다. 한국의 보수교인들 또한 단지 동성애, 낙태 등을 무조건 금지하고 반대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순한 흑백논리를 탈피하여,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각도로 성찰을 해야 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란 누구이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드린 기도에서, 제자들, 나아가 그들을 통해 믿게 성도들이 땅에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사는 가운데 보호해 주시길 기도 드린다.( 17) 기독교인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사는 '이중국적자'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가운데, 천국 백성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지켜 나가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당신의 향기로 살아가라 하시지만, 이러한 말들의 의미는 현실 가운데서 너무나 모호하고 이상적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땅의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이 생명 걸어 따를 있는 복음에서 추출한 현실적인 적용을 거의 선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강단과 현실은 간데 없이 괴리되어 있어, 설교를 들으면서도 성도들은 현실 가운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 막연해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갑자기 부흥하여 성도들이 바라 있는 , 부르짖을 있는 구호, 흔들 있는 깃발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고만 있어야 할까?

해법은 복음과 세상 사이에서의 고민은 현대 성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찾을 있다. 구름같이 허다한 신앙의 선배들 또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그들의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진지하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지난 2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그야말로 방대한 사상과 별처럼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도움이 된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 신학교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1951년에 출간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는,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하는 성도들에게 좋은 지침이 되는 책이다.


니버는 책에서 트렐취(E. Troeltsch) 이론을 활용하여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문화관을 다섯 종류로 제시하고 있다.



1.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급진론)

그리스도와 문화가 양자택일의 대립적 관계라는 관점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사는 문화를 포기 또는 배척하는 것을 충성된 신앙의 표시로 삼는 자세로, 기독교와 문화를 원수로 보는 관점이다. 성경으로는 요한1, 역사적으로는 터튤리안(테르툴리아누스) 말년의 톨스토이가 예이다.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론)

복음이 기존의 문화와 사회가 열망하는 바를 완성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리스도를 문화의 영웅이자 이상의 실현자로 본다. 사도행전에서 일부 근거를 찾을 있고, 철학과 이교 사상으로 기독교를 해석한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주로 지지되었다. 중세의 아벨라르, 근대의 리츨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3.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종합론)

기독교와 문화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 다의 관계로 보는 입장이다. 문화를 하위에 두고 기독교가 확고히 우위를 점하여 양자를 종합하려는 것이다.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이원론)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역설적 관계가 있다는 관점으로, 그리스도와 세상에 대한 이중적 충성이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문화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으나, 양극 사이에서 항상 긴장을 하도록 요구된다. 바울 서신서가 입장과 가깝고 루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5.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변혁론)

유형은 타락한 문화를 하나님께 쓸모 있게끔 변혁시키자는 관점이다. 성경의 요한복음, 어거스틴과 칼빈에게서 찾아볼 있다.



니버는 다섯 가지 유형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본다. 각각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으로 인해 입장의 특징과 장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한 입장에서 예로 들었던 인물들은, 입장 만의 '전형' 아니다. 그들 일생동안 주장했던 다양한 주장들 해당 관점과 가장 유사한 면을 들어서 예로 것이다. 오히려 여러 관점을 동시에 나타내 보여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책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유형은 '이중적인 변증법'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급진론과 문화론의 /반에 대해 입장 모두를 가진 중간적인 입장들이 합으로 나오고, 다시 중간적인 입장은 종합론과 이원론이 /반을 이루는 가운데 변혁론을 합으로 도출하는 형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니버는 변혁론을 지지하고, 독자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관점을 갖도록 유도되고 있다.


급진론과 문화론의 유형은 모두 인간을 과신하는 입장이다. 급진론은 자신을 철저하게 문화와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문화론은 문화와 뒤섞여서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근거가 모두 '교만'이다.



종합론은 고금을 통틀어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사항이다. 오늘날에도 가톨릭의 경우 교황이 수장이 되어 모든 교리 해석에의 최종적인 권한을 향유함으로써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만든 체계가 무오할 없고, 설령 무오한 체계를 만든다 하더라도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의 속도에 맞춰 진리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원론은 개혁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교회 대부분의 관점이다. 교회의 교회됨으로만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할 있다고 강조하는데 신앙과 현실을 분리시킴으로써 이름은 '개혁'이지만 실제로는 현상유지에 급급한 실정이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강한 군사로 훈련시켜서 현실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하는 분명한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고, 청년층을 위주로 교인들이 급격히 교회를 빠져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혁론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에 가장 부합한다. 급진론이나 이원론에 의한다면 어차피 신앙과 현실은 별개의 문제이기에, 성도는 굳이 세상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없다. 변혁론의 입장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살게 하시는 소명을 찾을 있다. 다만 경우에도 자칫 교만이라는 인간의 가장 무거운 죄성을 간과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책에서 니버는 무엇이 가장 옳은 관점이라고 답을 주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과 역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삶의 순간마다 결정해야 '실존적 책임' 가진 존재이다. 그럼으로써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주시며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삶의 현장 가운데 만나고 동행하게 된다. 자신의 관점에서의 적용을 굳이 제시하려 들지 않음으로써 책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귀한 지침서가 것이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어떤 입장에 속하는가를 계속 고민하였는데, 다섯 가지 유형의 특성이 모두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상황에 부합하는 정답이란 없다. 유형의 특징과 /단점을 숙지함으로써 사고능력을 개발하여 삶의 경우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사고를 있도록 하고,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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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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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국방부에서 금서를 지정한 것이 합법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군대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의 통제가 있을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면면을 살펴보면 어의가 없다.

공산주의와 주체사상 관계된 책이야 그렇다 생각한다 쳐도,

오래 전에 나와서 이미 대중적으로 많이 읽혀진 에세이집을

굳이 금서로까지 지정하여 통제한다는 것이 무슨 실익이 있을까?

오히려 국방부의 금서목록은, 대형서점 및 온라인서점에서

특별코너를 마련하여 판촉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수 많은 책들 사이에서 꼭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 목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비단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읽다 보면 특히 조선시대에 네 글자로 된 비밀스런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라든지, 정파간 정권이 바뀌는 반정과 예송논쟁,

환국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명칭이 '문체반정'이다.

조선후기 최고의 계몽군주라 평가되는 정조가,

그 토록 신뢰하고 중용하던 '백탑파'라 불리는 실학자들을

그들이 사용하는 문체가 비루하다 하면서 내친 사건이다.

그 중심에 백탑파의 정신적 지주인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가 있다.

양반들은 정묘년과 병자년에 걸쳐 두 차례의 침략으로 짓밟히고

왕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으면서도 변화하는 정세를 직시하길 거부하고,

우리가 '소중화'로 멸망한 명나라의 진정한 후예임을 자청하면서 청나라를 무시했다.

연암과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비판하면서 현실을 직시하였고,

계몽군주 정조는 그들을 중용하여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하게 하였던 것이다.

문체반정이란 표면적으로는 훼손된 고문의 가치를 되찾겠다는 의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되돌리는 것이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통제가 안 되는 급변하는 변화의 물결 위에

나라를 통채로 올려놓는다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일일 것이다.

반면에 이미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사람들에게,

뻔히 보이는 것도 부정하라는 것은 그 동안 지켜왔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은 일종의 반성문인 고어체의 자송문 쓰기를

그 토록 힘들어하고 결국 거부했던 것이다.

이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박제가의 말을 인용한다.

"젓갈이 짜지 않다. 매실이 시지 않다. 찻잎이 쓰지 않다.

이런 책망을 하신다면 얼마든지 되살필 뜻이 있으이.

하나 소금, 매실, 찻잎을 일러 왜 너희는 겨자처럼 맵지 않느냐

꾸짖으신다면 이 세상에 맛난 음식은 모두 사라지고 말 걸세."

서얼 출신의 박제가에게 있어 옛날 질서로 돌아간다는 것은,

서자는 인간 취급 받지 못하는 세상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다.

아무리 외면해도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현 정권과 집권세력은, 30년 전 처럼 언론과 사상을 통제함으로써

국민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국방부의 금서 지정과 이를 추인한 법원은

마치 중국 문화혁명 시대의 천둥벌거숭이 홍위병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새로운 지식을 빨리 습득하고

높은 교육열을 가진 국민임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를 직면하길 거부했던 조선이

불과 백 여 년 후에 선진문물 도입에 애썼던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듯이,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외면하고 우민화 하려는 시도를 하는 자들이

계속 권력을 잡는다면 이 나라의 운명은

나락에 빠져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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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하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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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동양과 서양이 다르다는 거야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지만,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주제가 '인간관'이다.

서양 사람들은 사람을 '부분적'으로 본다.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잘 하는 점이 있으면 잘 못 하는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떤 직무가 있다면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일하게 하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가령 프랑스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된 올랑드의 경우,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동거를 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 국민들에게 있어 그건 개인적인 선택일 뿐,

정치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제도화 된 것이 민주주의 대의제이다.

더우기 오늘날과 같이 정보를 특정 소수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 공유하는 시대에는,

공사를 구분하고 사람을 기능적으로 제한하여 바라볼 필요가 더욱 크다.

한편, 동양에서는 사람을 '전인적'으로 본다.

수기치인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투표로 사람을 뽑을 때에도

자꾸만 흠이 없고 두루두루 원만한 사람을 뽑으려 든다.

합리적이고 참신한 정책을 통해 유권자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민주주의 대의제와는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기에 크고작은 모든 선거가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폭로와 선동으로 일관되는 것이다.


고금동서를 통틀어 왕이라는 자리는 모든 권력이 모아지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모든 의사결정의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리이다.

그러니만큼 왕이라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조차 할 필요 없는

수 많은 고민과 결단을 해야만 한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비열함의 대명사로 알려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런 각도에서 다시 평가되어야만 한다.


김탁환 「열하광인」은 세종대왕과 함께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정조'라는 인물을 이런 관점으로 재조명하게 한다.

물론 정조는 서얼을 중용하고, 규장각을 통해 학문을 장려하며,

침체된 국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훌륭한 임금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그랬다고 해서 정조가 백탑파와 같은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조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쓸 수 있을 때

백탑파 서생들은 임금의 신뢰를 받고 중용되었지만,

상황이 바뀌면 이들을 내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문체반정이란 백탑서생들을 내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군왕에게는 군왕의 길이 있다.

이를 일반인의 관점에서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이해할 수는 없다.

대선이 다가온다.

조선의 군왕과 유사한 '만인지상'의 자리를

일반 국민들의 선거를 통해 뽑는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저마다 자기 입장에서 선호를 표시하는 것이 선거이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선택을 받는다는 것 만으로

그 사람이 대통령직에 최선이라고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일을 하면 문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가만히 있으면 이룬 것도 없지만 문제도 없다.

지금과 같이 상호비방과 폭로 만으로

유권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국정의 책임자를 선출하여 절대권력을 부여하는 제도가

과연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서양에서 제도를 수입해 온 만큼,

사고방식 또한 닮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자리가 있으면 그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는 '전인'이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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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길 - 위대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 자서전 하나님의 사람 10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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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책상의 책꽂이에는

친척집에서 얻어 온 오래된 12권의 전기전집이 있었다.

책은 좋아하는데 별로 읽을 책이 없던지라

세계 각국과 우리나라의 위인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읽었고,

전체 내용 까지는 아니더라도 각 인물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내용들은

그 후로 지금까지의 삶 동안 많은 영향을 줬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전기는 가장 기피하는 쟝르가 되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에,

책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위인들 중 상당수의 실체는

책의 내용과 180도 다른 인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정 인물을 우상시하여

인간이기에 가지는 단점까지 덮어버리고 삭제를 시켜 놓았다.

이런 점은 자서전이라는 쟝르가 가장 심각하다.

우리나라 저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저술한 책의 목적은 대부분이 '홍보'이다.

미사여구로 윤색된 그 책들을 읽으면 독자들은

오히려 그 인물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될 정도이다.

(1995년 베스트셀러인 「신화는 없다」라는 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서구 사람들이 기록한 전기나 자서전은 전혀 다르다.

독자가 읽으면서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그 인물과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독자들은 이 책들을 통해 이들 또한 실패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 인물이 되었음을 배울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Unfinished Agenda)」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이라는

20세기 대부분을 선교사이자 선교신학자로 살아온 분의 자서전이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서 활동했고,

교회의 하나됨을 주장했던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온 분이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라고

지칭했던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부터

수 많은 일들이 인류 역사에 벌어졌던 시대이다.

혼돈 가운데 지난 시대까지 오랫동안 진리라고 믿어왔던 기독교 신앙은

한낱 시대에 뒤떨어진 잡소리 정도로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청교도 신앙과 대각성 운동으로

세계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감당해 온 영국교회를 비롯한 서구 교회는,

지금 그 어떤 위험보다도 심각한 '세속화'라는 적과의 혈투를 벌리고 있다.

35년이란 긴 세월을 선교사로서 지내다가

은퇴하여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에게 있어

영국은 다시 복음이 선포되어야만 할 선교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레슬리 뉴비긴이 지난 세월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역과 삶에 대해 정직하게 기록해 놓은 귀한 책이다.

선교사가 되기 까지의 준비,

남인도에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회로의 연합,

세계 기독교의 연합과 선교사 은퇴 후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새로운 선교사역까지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읽으면서 무척 놀라웠다.

그의 삶은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수 많은 수고와 인내의 연속이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 많은 수고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먼저 뉴비긴 자신을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셨고,

때가 되어 과업들을 맡기시고 감당할 지혜와 힘을 주셨다.

뉴비긴은 '과연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무엇이든 한다'는,

진정한 종의 자세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해 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면, 진정한 성도란

결국 '십자군의 마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책을 읽으면서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 닳아서 없어지길 기도했다는

휫필드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진정한 '평화의 도구'로 길 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등불을 비춰주는 귀한 신앙 선배를 만나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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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4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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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가 옮겨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 기독교의 쇠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 이백만 성도라고 허장성세를 떨지만, 실제적인 기독교인의 수는 이미 오래 전에 천만 명 밑으로 떨어졌고 오늘날은 7백만 정도로 추산된다. 절대적인 수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점은 연령대별 비율이다. 의료의 발전에 따른 자연적인 수명의 연장으로 노년층 교인들의 수의 감소가 완만해져서 그 심각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뿐, 현재 및 장차 조국을 어깨에 짊어지고 갈 청장년 층의 이탈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러다가 서구의 교회가 그렇듯이, 커다란 교회건물에 노인 몇 명만 예배 드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이다. 벌써부터 교회 건물을 유지할 수 없어서 결국 술집이나 심지어 이단 종파에게 매각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되고 있다.

 

수의 감소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빛과 소금 된 본질의 상실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의미가 그저 이력서 상 종교란에 기재하는 사항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을 걸고 생명을 걸고 죽음을 걸고 영생을 걸 이름이라는 사실을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름뿐인 교인들로 넘쳐 난다. 사회 곳곳의 부정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이름이 단골로 올라 온다. 요즘은 불신자들조차 쉽게 저지르지 않는 악행을 예사로 저지른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기독이라는 이름이, 개 같은 인간들이라는 뜻의 개독이라는 이름으로 비하되어 불린다. 신자들로 인해 주님의 이름은 침 뱉음 당하고 땅에 짓밟혀 갈가리 찢어지고 있다.

 

구약의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백성들이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살아가던 시대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꼭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좋은 것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려 들기 보다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거인처럼 내 소원을 들어 줄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세워 경배한다.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강단에서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반 쪽짜리 번영신학이 주로 선포된다. 주님을 부인할 수 없어 불에 타 죽고, 짐승의 이빨과 발톱에 찢겨나갔던 신앙 선조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너무도 쉽게 죄악과 타협하고 거리낌 조차 없다.

 

한 세대 전에 청교도와 대각성 운동의 신앙선배들의 유산을 잃어버리고 세속화 된 조국 영국의 현실 앞에서 가슴을 찢었던 신앙 선배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하여 혼란하기 그지 없던 인도에서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선교 활동을 했던 분이다. 그의 눈에 비친 영국은 다시 선교가 필요한 땅이 되어 있었다. 세속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은 그야말로 미련한 것일 뿐, 고려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리고 뉴비긴은 또 보았다. 너무나 편리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영국인들의 가슴에 그런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구멍이 있음을. 겉으로는 세상 모든 일에 통달한 양 지혜로운 척 으스대지만 정작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끝없는 소비활동과 쾌락의 추구로 불안하고 공허한 심정을 채워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어 절망하게 된다. 인정하든지 부인하든지 그들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

 

뉴비긴은 일흔을 넘긴 노구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이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전 생애를 걸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왔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맡겨진 사명이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는 뉴비긴이 1988년에 대학교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묶은 책으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상이 가장 집약적이고 짜임새 있게 서술되어 있는 저서이다. 이 책은 복음주의 대표적인 잡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가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서적 100권 가운데 하나로 선정한 책이다. 한국에서는 한국 IVP에 의해 1998년에 번역 출간되었다가, 2007년에 모던 클래식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선정되어 새롭게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의 변증과 설득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 조차도 편견 없이 이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저자의 강력한 주장에 압도되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여타 저작들에서 이런 저런 내용을 짜집기 한 책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진정성과 설득력 때문이다. 뉴비긴의 신학은 책상과 강단에서 형성된 사문화 된 것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현지에서, 그리고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철저하게 검증을 거친 살아 숨 쉬는 신학이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 같은 근대와 현대의 철학과 사상들이 별 근거도 없는 모래밭 위에 세워진 집일 뿐임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소망의 이유가 필요하다. 신앙이라는 것도, 전도라는 것도, 선교라는 것도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확립되고 그에 대한 벅차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내가 믿는다는 복음이 가진 탁월함과 영광스러움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어야만 다른 사람에게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일평생을 주님의 도구로 부르신 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녹슬기 보다는 닳아 없어지도록살아왔던 노 선교사의 역작을 읽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독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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