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문화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6
헬무트 리처드 니버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얼마 미국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의 의식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뉴스가 전해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인, 나아가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한국의 보수교인까지도 집단적인 '멘붕(멘탈붕괴)' 벌어질 만한 뉴스였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쪽에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대통령을, 다른 쪽에는 동성애와 낙태는 반대하지만 이단인 몰몬교도인 상대당 후보를 놓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것이다. 한국의 보수교인들 또한 단지 동성애, 낙태 등을 무조건 금지하고 반대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순한 흑백논리를 탈피하여,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각도로 성찰을 해야 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란 누구이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드린 기도에서, 제자들, 나아가 그들을 통해 믿게 성도들이 땅에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사는 가운데 보호해 주시길 기도 드린다.( 17) 기독교인은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을 사는 '이중국적자'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가운데, 천국 백성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지켜 나가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당신의 향기로 살아가라 하시지만, 이러한 말들의 의미는 현실 가운데서 너무나 모호하고 이상적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땅의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이 생명 걸어 따를 있는 복음에서 추출한 현실적인 적용을 거의 선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강단과 현실은 간데 없이 괴리되어 있어, 설교를 들으면서도 성도들은 현실 가운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 막연해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갑자기 부흥하여 성도들이 바라 있는 , 부르짖을 있는 구호, 흔들 있는 깃발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고만 있어야 할까?

해법은 복음과 세상 사이에서의 고민은 현대 성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찾을 있다. 구름같이 허다한 신앙의 선배들 또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그들의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진지하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지난 2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그야말로 방대한 사상과 별처럼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도움이 된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 신학교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1951년에 출간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는,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하는 성도들에게 좋은 지침이 되는 책이다.


니버는 책에서 트렐취(E. Troeltsch) 이론을 활용하여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문화관을 다섯 종류로 제시하고 있다.



1.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급진론)

그리스도와 문화가 양자택일의 대립적 관계라는 관점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사는 문화를 포기 또는 배척하는 것을 충성된 신앙의 표시로 삼는 자세로, 기독교와 문화를 원수로 보는 관점이다. 성경으로는 요한1, 역사적으로는 터튤리안(테르툴리아누스) 말년의 톨스토이가 예이다.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론)

복음이 기존의 문화와 사회가 열망하는 바를 완성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그리스도를 문화의 영웅이자 이상의 실현자로 본다. 사도행전에서 일부 근거를 찾을 있고, 철학과 이교 사상으로 기독교를 해석한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주로 지지되었다. 중세의 아벨라르, 근대의 리츨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3.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종합론)

기독교와 문화를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 다의 관계로 보는 입장이다. 문화를 하위에 두고 기독교가 확고히 우위를 점하여 양자를 종합하려는 것이다.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이원론)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역설적 관계가 있다는 관점으로, 그리스도와 세상에 대한 이중적 충성이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문화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으나, 양극 사이에서 항상 긴장을 하도록 요구된다. 바울 서신서가 입장과 가깝고 루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5.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변혁론)

유형은 타락한 문화를 하나님께 쓸모 있게끔 변혁시키자는 관점이다. 성경의 요한복음, 어거스틴과 칼빈에게서 찾아볼 있다.



니버는 다섯 가지 유형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본다. 각각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으로 인해 입장의 특징과 장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한 입장에서 예로 들었던 인물들은, 입장 만의 '전형' 아니다. 그들 일생동안 주장했던 다양한 주장들 해당 관점과 가장 유사한 면을 들어서 예로 것이다. 오히려 여러 관점을 동시에 나타내 보여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책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유형은 '이중적인 변증법'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급진론과 문화론의 /반에 대해 입장 모두를 가진 중간적인 입장들이 합으로 나오고, 다시 중간적인 입장은 종합론과 이원론이 /반을 이루는 가운데 변혁론을 합으로 도출하는 형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니버는 변혁론을 지지하고, 독자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관점을 갖도록 유도되고 있다.


급진론과 문화론의 유형은 모두 인간을 과신하는 입장이다. 급진론은 자신을 철저하게 문화와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문화론은 문화와 뒤섞여서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근거가 모두 '교만'이다.



종합론은 고금을 통틀어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사항이다. 오늘날에도 가톨릭의 경우 교황이 수장이 되어 모든 교리 해석에의 최종적인 권한을 향유함으로써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만든 체계가 무오할 없고, 설령 무오한 체계를 만든다 하더라도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의 속도에 맞춰 진리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원론은 개혁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교회 대부분의 관점이다. 교회의 교회됨으로만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할 있다고 강조하는데 신앙과 현실을 분리시킴으로써 이름은 '개혁'이지만 실제로는 현상유지에 급급한 실정이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강한 군사로 훈련시켜서 현실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도록 하는 분명한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고, 청년층을 위주로 교인들이 급격히 교회를 빠져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혁론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에 가장 부합한다. 급진론이나 이원론에 의한다면 어차피 신앙과 현실은 별개의 문제이기에, 성도는 굳이 세상에서의 삶에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없다. 변혁론의 입장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살게 하시는 소명을 찾을 있다. 다만 경우에도 자칫 교만이라는 인간의 가장 무거운 죄성을 간과할 있다는 우려가 있다.


책에서 니버는 무엇이 가장 옳은 관점이라고 답을 주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과 역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삶의 순간마다 결정해야 '실존적 책임' 가진 존재이다. 그럼으로써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주시며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삶의 현장 가운데 만나고 동행하게 된다. 자신의 관점에서의 적용을 굳이 제시하려 들지 않음으로써 책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귀한 지침서가 것이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어떤 입장에 속하는가를 계속 고민하였는데, 다섯 가지 유형의 특성이 모두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상황에 부합하는 정답이란 없다. 유형의 특징과 /단점을 숙지함으로써 사고능력을 개발하여 삶의 경우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사고를 있도록 하고,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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