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마찬가지 조선시대에도 엉터리 정치, 잘못된 관행과 사리사욕을 챙기기 바빴던 공직자들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이때 다산은 형사 사건을 처리할 때의 실제 사건 사례와 비평을 실은 '흠흠신서'를 썼고 지방관리들은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흠흠신서'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 내어 일차적인 조사와 판결과정슬진행했다고 한다. 30권 10책의 '흠흠신서' 라니. 놀랍고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의 살인사건은 확실하게 범행의 전말을 밝히지 못하면 임금은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여러차례 재수사를 하기했지만 대부분 효과가 없어 시간만 허비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시신이 부패해 다시 검시를 못하거나 증인이 나이들어 죽거나 소재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살인사건 수사일지는 흥미로웠다.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간통!! 정말 싫은 간통!! 근데 간통한 놈과 아비가 부인(며느리)을 죽이는 사건에 화가 났다. 뻔뻔한 인간들!!! 이종대가 자기 집의 여종과 간통을 저지르고 이를 뒤늦게 안 본처 전 씨 부인과 다투는데 이종대의 아버지가 며느리의 악다구니를 꾸짖고 싸움에 끼어들었고 두사람의 무지막지한 폭행끝에 전씨 부인이 그자리에서 숨졌고 이종대 부자는 시신을 연못으로 끌고 가 목에 줄을 매어 물에 던지고는 자살로 위장했다.(진짜 욕이 나올뻔했다. 잔인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뻔뻔하다) 이후 마을에 그들의 악행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지방관청의 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시신을 물에서 건져올렸는데 이미 죽은지 보름이나 지나서 온몸은 썩어 문드러지고 여러군제 폭행의 흔적이 발견돼 타살인 게 밝혀졌다. 그런데!!!당시의 법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이면 유배형에 처하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면 사형이 관례였지만 집안의 최고 어른인 시아버지에게 며느리가 대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시대였기에 시아버지가 다툼 끝에 며느리를 죽인 살인행위보다 어른에게 대든 불경의 죄를 크게 물었다고 한다!!(말도 알된다!!간통한 남편을 보고 참으란 말입니까? 아버님?) 이 사실을 알고 이종대 부자는 남편에게 함부로하는 며느리를 시아버지가 꾸짖고 며느리가 대드는 못된 행동을 해 시아버지가 폭행을 가하고 남편이 여기 가담했다고 말을 바꾼다.(하!! 진짜!! 어디 빠져나가려고!!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빠져나가려했지만 엄중한 문초 끝에 이종대가 아내를 발로 수차례 걷어차고 아버지도 거들었다고 이실직고 말했지만 자신의 폭행으로 아내가 죽은 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아내가 분을 못이겨 스스로 물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종대의 비겁한 태도에 분노한 정조는 그를 엄하게 형장을 쳐서 끝내 자백을 받았다고 한다.(읽는 내내 치가 떨린다. ) 이제까지 아내를 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임금이 대부분 살려주는 판결을 내렸지만 이번만큼은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분부했다고 다산은 말한다. 이종대의 성정이 정직하지 않았고 몹시 잔인하기에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이종대와 그의 아버지는 살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살로 조작하는과정에서 이미 숨을 거둔 아내의 목에 줄을 매어 물에 빠뜨리고도 아내가 분을 못 이겨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고 고집했기에 결국 결국 범죄자의 교활함을 응징하는 판결을 내려진 것이다. 그외에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36건의 살인사건이 쓰여져있고 이를 기초로 조선의 과학수사 지식을 모아 정약용은 흠흠신서를 집대성한다. 다산은 정조 임금의 지지를 받고 세상을 바꿀 개혁을 준비했지만 끝내 그의 능력과 개혁안은 현실에 쓰이지 못했다. 지금처럼 당쟁이 치열하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공격을 받아 관직을 잃고 천주교를 믿었다는 명목으로 유배를 떠난 그. 그럼에도 학문에 매진했던 그는 너무도 멋지고 배울 점이 많은 듯하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