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에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도시는 점점 더 크고 화려하게 외양을 치장하고 쭉쭉 뻗어 올라갔지만 그곳에 내가 있을 곳이, 마음을 둘 곳이 조각보만큼도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도시도,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도시도 어느 한곳 헐렁한 곳이라고는 없이 꽉 차 보였다. 도시가 나한테 말했다. 도시에 있지 마라. 도시에서는 불행하고 가난했다. 그래서 부림지구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고 그 이후로 나는 줄곧 부림지구에 살았다. p254

제철단지는 군데군데 이가 빠진 듯, 훼손이 심했다. 그러나 지진이 아니라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와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망가진 건 부림지구가 아니고 인간들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몸이 가루가 되어 제철단지 담벼락에 웅덩이에, 공기 중에 마구 흩어지고 나뭇잎에 붙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냥 가루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p261

지금 내가 가진 유일한 소유물은 더러워진 정맥류 스타킹과 지진으로 인해 다 부서져버린 이 삶뿐이다. 벙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벙커에서는 그래도 좋았다. 좋았던 시간, 앞으로 그런 시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염된 지역에 남은 우리만이 이제 부림지구의 주인이었다.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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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의 유진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에게 재난이 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책 속에서 시선을 뺏은 인물들과 우리가 부디 지치지 않기를, 견뎌내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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