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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ㅣ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평점 :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러운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윌리엄 셰익스피어
중세 유럽에서는 대죄악이었다.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이 자살을 예술의 완성로 여기자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이 천재들이 치러야 하는 많은 대가 중 하나라 생각했고. 19세기 이르자 자살은 간통처럼 일종의 부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예술의 새로운 관심사가 ‘자아’가 되었으므로 자아의 끝인 죽음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당시 프랑스에서는 예술 포함 모든 것을 거부한 다다이스트들의 종국이 되었다. 우리가 속해있는 21세기에서 자살은 무엇인가? 일부 종교인들에겐 여전히 죄악이겠으나 더 많은 사람에겐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사회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자살은 왜 문제인가? 해선 안 될 이유가 뭘까? 죄책감 속에 남겨질 사람 때문에? 인생은 딱 한번 뿐이라서? 누군가는 간절히 바랄 내일을 포기하는 게 죄라서? 진짜 사는 게 죽기보다 어렵고 괴롭다면 왜 자살만큼은 하면 안 되지? 자살자들의 (시도자였나?) 70% 이상이 시도 전 반드시 신호를 보낸다는데 철저히 고립시킬 땐 언제고, 아예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 같던 사람들까지 죽지는 말지… 거기서라도 행복하라며 명복을 비는 것도 위선 아닌가?
이런 잡생각(?)의 폭주가 ‘근데 나는 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을까. 자살을 ‘선택’이라 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엇이 다를까라는 종착지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이 책은 그즈음 눈에 띈 덕분에 읽게 됐는데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었다.
‘죽음의 성향’이 자살 기도자의 환경에 내재할 경우, 그 성향이 그의 자기 파괴에 대한 고정관념을 실제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소인을 이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중략) 어떤 사람은 자살을 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도 이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p.191
이 정도뿐. 저자는 자살이란 행위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이 책을 썼다. 독자는 정신분석학상의 갖가지 자살 이론과 숱한 사례를 접하지만 확실한 답이나 해결책을 얻을 순 없다. 그 이유로 내가 파악한 게 맞다면 자살은 영구히 미제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자살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각기 다른 복잡하고 모호한 사정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남겨진 자들의 해석은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가들은 자살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입을 굳게 닫고 (중략) 유난히 회피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분명하다. 정신분석가에게는 자살에 성공한 환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분명한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략) 또한 그들에게는 또다른 어려움이 있는데 (중략) 정신분석가는 자살이 우려되는 환자와 자살 미수자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살에 성공해 버린 경우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자살은 지금까지 대체로 측면에서부터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p.179~180
납득되지 않나. 저자는 해답을 내놓는 대신 두 가지 편견을 보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첫째는 자살을 도덕적 범죄나 질병으로 치부하는 종교적 태도, 둘째는 자살을 연구 소재로 취급하는 과정에서 통계로 환원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심각한 의미는 모두 박탈하는 과학적 태도.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살에 편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솔직히 죽음의 집으로 달려가선 안 되는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왜 어떻게든 버텨주길 바라게 되는 걸까. 어쩌면 우린 모두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 깊고 어두운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손 내밀어 줄 사람이 분명히 있다. 부디 도움을 청해주기를.
“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를 때는 담배를 피워라, 마음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모를 때는 <타임>을 읽어라.”-드와이트 맥도널드
“어딘가 다른 곳에도 세상은 있다.”- 코리놀라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