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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데 - 고양이 추리소설
아키프 피린치 지음, 이지영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6월
평점 :
펠리데의 주인공은 고양이다. 주인공 프란시스는 주인인 구스타프를 따라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온다. 그런 프란시스 앞에는 연쇄 살묘(?) 사건이 기다린다. 소설은 프란시스가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가는 모습을 담는다. 프란시스는 냉소적인 천재 고양이다. “천재” 라는 표현은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다. 프란시스는 마치 인간 탐정처럼 사건의 범인을 추리해 나간다. 심지어는 나중에는 컴퓨터도 다룬다.
프란시스는 파스칼이라는 고양이의 도움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나간다. 이름을 보고 설마 했는데, 수학자 파스칼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따온 것이었다. 파스칼도 천재 고양이다. 컴퓨터도 다루고 심지어 프로그래밍까지 한다. 프란시스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나도 이런 고양이가 있어서 내 코딩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아닌가? 그러면 내 일자리에 타격이 있을지도.
소설 속의 고양이들은 인간을 아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펠리데의 친구인 블라우바트는 인간을 ‘깡통따개’ 라고 부르며 조롱한다. 소설은 이런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간을 마음껏 비판한다. 작품 속에서 고양이의 라이벌은 개가 아닌 쥐다. 톰과 제리처럼. 고양이들은 쥐를 언젠가 지구상에서 모두 없애 버려야할 존재로 본다. 그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란시스가 사건의 진상을 쫓던 과정에서 율리우스 박사라는 미치광이 과학자의 일기를 발견한다. 이 과학자는 어떤 상처도 금방 이어 붙일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험은 거듭해서 실패한다. 투자자는 더 이상 시험을 지원하지 않는다. 이에 그는 불법으로 이 끔찍한 실험을 계속한다. 수 많은 고양이에게 죽음이라는 폭력을 휘두르며. 나는 이 장면에서 생명의 존엄을 무시하고 호기심과 아집에 집착하는 광인을 보았다. 과학자의 광기는 습득한 지식의 크기와 도덕성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비극적이다. 한 사람의 일탈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은 현실에서는 수많은 약품, 화장품, 의류를 생산하려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또 단지 식량으로 삼으려고 대량으로 가축을 키우고 대량으로 도살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을 약육강식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만물의 영장인 인류의 권리인가?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얼마 전에 본 영화인 ‘옥자’의 장면들을 같이 떠올리면서 고민해본다.
제목인 펠리데는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럼 무슨 뜻이지? 무척 궁금하다. 사전이라도 뒤져 볼까 했으나, 꾹 참고 소설을 읽어 나갔다. 다행히 작가가 작품 안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펠리데는 고양이과의 학명이다. 거기에 더해서 인간에게 길들여지기 이전의 원시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범인이 자신의 동족을 이런 모습으로 회귀시키려 사건을 일으킨다. 범인은 이 과정에서 끔찍한 실험을 한다. 프란시스에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나 할만한 실험을. 미치광이 과학자의 희생자가 미치광이 과학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마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모습 같다. 작가가 독일인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지도. 이런 폭력의 연쇄가 발생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사족 몇 가지.
작품을 보면서 집에 CCTV를 달아 놓았으면 주인들이 기절초풍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혼자서 컴퓨터를 다루는 고양이라니! 그러나 곧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 고양이들은 자신이 컴퓨터를 다루고 인간과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조차 감쪽같이 숨긴다. 이내 CCTV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연기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주석이 매우 훌륭하다. 상세하게 서술한 내용을 보면서 작가가 고양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꼈다.
프란시스의 꿈은 사건 전반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떠올려 보았다. 또 실제로 고양이도 꿈을 꾸는지 궁금하다. 잠들었을 때 가끔 움찔거리는 모습을 봐서는 맞는듯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