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의 번역 - 요리가 주는 영감에 관하여
도리스 되리 지음, 함미라 옮김 / 샘터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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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요리는 허무한 일이다. 엄마가 해주시던 맛있는 음식은 손이 빚어내는 예술이었다. 계량화시킬 수 없었지만 각종 양념들이 배합되어 마지막 손맛이 첨가되었을 때 요리는 정점을 찍고 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마술을 부렸다. 엄마는 식탁에 올라온 반찬들을 모두 다 먹어주길 바라며 눈을 반짝였고 혹시 손이 가지 않는 반찬이 있다면 꼭 한마디를 곁들였다. "이것도 먹어봐, 맛있어."

내가 요리를 허무하게 느낀 건 분명 결혼 후에 벌어진 일이다. 그전엔 직장생활하느라 라면도 직접 끓여보지 못했으니까. 네이버도 없던 시절, 엄마의 짧은 훈수를 전화기 너머로 듣고 밥을 하고 반찬을 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두 시간 가량을 조리대 앞에서 서성거려야 반찬 서너개 만들고 국을 끓인 식탁이 마련되었을 정도이다. 결혼 당시 몸무게는 38kg 정도였으니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건설회사 말단 직원이었다. 퇴근하면 또 얼마나 식욕이 왕성했겠는가.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치우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러나 먹는 시간은 5분~! 체감상 5분이었을까? 너무 빨리 먹어치웠고, 맛있다, 수고했다 말 한마디 없고 식탁 교제도 없었다.(남편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남겨진 빈그릇을 설거지하느라 또 서있어야 했다. 계속되는 요리에 관한 부정적 피드백이 요리에 관한 나의 정서를 만들었다. 요리는 허무해...

[미각의 번역] - 요리가 주는 영감에 관하여 - 도리스 되리 지음

생각해보면 누구 탓도 아닌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요리에 접근했다면, 요리가 이렇게 숭고한 일이라는 걸 알았었다면 절대로 허무하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으리라.
이 책은 내게 요리는 허무하다는 생각을 무너뜨렸다. 저자는 고향 독일의 음식과 세계 곳곳의 음식을 맛보며 그 안에서 깨달은 영감을 신나게(!) 표현했다. 육지와 바다 많은 음식 재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것들의 심오한 변화, 혹은 각각의 아름다운 개체가 되어가는 과정인 요리에 대해 들려준다.

음식을 어디에서 먹는지, 누구랑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 무엇때문에 먹는지, 어떤 상황에서 먹는지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하는지다. 그에 따라 음식의 맛은 완전히 달라진다. 요리는 그저 단순히 삶고 튀기고 익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주 섬세하고 오묘한 과정을 거친다. 과학적이고 정서적이며 예술적이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음식이다.

재료와 요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음식의 맛을 풍부하게 한다. 요리와 음식을 마주하며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낼 줄 아는 안목이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문어>라는 챕터에서 문어에 반해 더 이상 오징어류를 먹을 수 없게 된 저자의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고 음식 재료에 대한 자세도 다시 살펴보게 한다.

(139p) "문어는 지루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지루하게 있느니 어렵사리 돌려 닫은 병뚜껑을 능숙한 솜씨로 열며 노는 걸 더 좋아한다. ㆍㆍㆍ 수족관 벽에 빨판을 붙여 좁디좁은 수족관 뚜껑 틈새로 몸을 비집고 빠져나가기도 한다. 사람을 알아보기도 하고, 호불호도 아주 분명하다. 신이 나면 친구의 얼굴에 물을 분사하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문어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140p)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존재 앞에서 나는 무장해제되고 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아주 약간의 우아함> 챕터에서 저자는 식탁에서의 태도에 관해 말한다. 아주 약간의 우아함을 찾아 꺼내어 놓고 음식을 가득 채운 접시를 앞에 두고 절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300p) "자기 앞에 놓인 그릇 위에 음식이 담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동물, 식물의 수고와 협력, 희생이 있었는지 식사 때마다 들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과 단절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마지막 챕터 <효모가 우리 일상에 거는 주문>에서 저자는 효모 반죽에 찬사를 보내며 우리 내부를 짚어보게 한다.

(305p) "'당신이 반죽을 빚는 것이 아니라, 반죽이 당신을 빚는 것이다.' 한 선사의 부엌에 쓰여 있던 말이다. 반죽은 현재의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인내심이 없는지, 매사에 정확한지, 산만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예쁘게 부풀린 효모 반죽이란 찬사와 같은 것이다."

"나는 음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감각을 배우고
개인의 책임을 깨달았다."
-삶의 풍미를 발견하는 맛의 산책, 책 뒷표지

나는 못 먹는 음식이 좀 있다. 그 외에는 대부분 다 '맛있다!'고 감탄하며 먹는다. 지금도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신다. "얘는 뭐든 다 맛있다고 해." 그러면서 좋아하신다. 표현해줘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정말 다 맛있다. 식당 음식도 어쩜 그리 맛있는지... 나는 맛있다는 말을 참 잘한다.
이 책을 읽고 덮으면서도 맛있는 음식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쭈꾸미, 잔치국수, 삼겹살, 상추, 된장찌개, 김치찌개, 피자, 파스타, 냉면도...

맛있는 음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자연에서 제공되는 요리 재료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요리를 하는 분들에게 경외감을 갖는다. 나는 존경한다. 요리에 철학을 가지고 정성껏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예술인과 다름없는 요리사를.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모든 삶에 감사하고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먹을 때마다 못 먹는 자를 떠올리며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되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샘터'에서 도서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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