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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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침전되어있던 내 안의 씁쓸한 과거의 기억들이 소용돌이쳤다. 작품 속에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빛과 어두움, 낮과 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낙관과 비관이 내용의 시종을 이끌어가고 있었고, 나는 너울질하듯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감정에 넋이 빠져있었다.

섬뜩한 단어들이 내뿜는 기에 눌려 주인공 안드레아와 함께 억압된 현장속에 있으면서 절망했다. 작품 속 문장들은 피폐해진 인물들의 심리와 무의식까지 샅샅이 찾아내어 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데 넘치도록 충실하다.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은, 어둡고 침침한 그 공간의 구토나는 삶에 나도 음침하게 벌레처럼 아둥거리게 했다.

스페인 내전을 겪고 난 후 사람들의 망가져버린 삶을 그린 소설이다.
[아무것도 없다] 카르멘 라포렛

홀로 된 주인공 안드레아는 대학에서 문학을 배우기 위해 외갓집이 있는 바르셀로나에 간다. 희망을 품고 찾아간 바르셀로나, 외가의 아파트는 기괴하고 썩은 냄새가 풍기는 역겨운 공간이었다.  내전을 겪고 난 후 미쳐버린 듯한 외가 식구들을 대면하면서 도망칠 수 없는 역겨움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장면들 속에는 왠지 암울한 뭔가가 감도는 듯했고, 집 안은 모든 공기의 흐름이 차단되어 썩어가고 있기라도 한 듯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로 가득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유령 같은 여자 몇이 나와 선 게 보였다."- 23p

앙구스티아스 이모의 억압과 외가 식구들의 숨겨진 사연들, 오래된 아파트의 어둡고 썩은 공기를 흡입하며 구토가 날 만큼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안드레아는 1년을 지낸다.  밤이나 낮이나 숨막히는 긴장감이 외갓집에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 안에서 서로 미친듯이 헐뜯고 폭력을 일삼으며 서로가 적이 되어 공격하고 견제하는 삶은 지옥이 따로 없다.

안드레아는 학교에서 '에나'라는 친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친구 에나와의 만남 속에서 안드레아는 잠시 빛을 발견하기도 하고 '기홀스의 아틀리에'에서 자유도 누려보지만, 빛과 어두움의 뚜렷한 경계를 맛보게 되면서 전보다 더한 상실감에 치를 떤다.

그러나 에나와의 우정은 외갓집에 저당잡힌 안드레아의 정체성과 꿈과 희망에 해방을 불어넣어주고 성장할 수 있는 희망의 밧줄이 된다. 에나가 초대한 '마드리드'로 출발하면서 안드레아는 발견했다. 희망을 찾아 바르셀로나의 외갓집에 왔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울컥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 계단을 처음 오를 때 가졌던 새 삶에 대한 가슴 떨리는 희망과 열망이 기억났다. 그런데 지금 나는 1년 전에 막연히 알기를 바랐던 충만한 인생과 기쁨, 심오한 관심, 사랑,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다시 떠나는 것이었다. 아리바우 거리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내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485p


소설은 스페인 내전 이후의 삶을 다룬 아주 간결한 내용이지만, 작가는 유려한 필체로 마음을 휘어잡아 독자를 작품 속에 가둬버리는 마법을 부렸다.

외갓집의 괴기스러운 아파트에서 함께 비탄에 빠져 뒹굴고, 외갓집 식구들의 정신착란적인 광기속에 진실로서 홀로 서있게 하는 공포스러운 고독을 느끼게 했다. 에나와의 사이에서 생의 찬란함을 맛보게도 했다.

마치 지옥과 천국의 시소에서 미끄러지듯 내몰리는 안드레아의 정신과 육신이 내 것인것마냥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휩쓸리며 아픔을 공감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잡아끌면서 동시에 일체감으로 소설 속 안드레아를 체휼하게 한다. 작가는 스무살 남짓의 나이에 이 소설을 썼다는데 천재적인 문학적 소양을 지닌 작가라 불리울만 하다.

"어차피 내 인생의 끝이 막다른 골목이라면, 인생을 굳이 힘겹게 뛰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향유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어떤 이들은 죽도록 일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어떤 이들은 그저 ㅇ니생을 지켜보기 위해 태어나는가 보다. 나라는 사람은 그 관조자의 역할을, 그것도 아주 미미한 역할을 하도록 타고 난 것 같았다. 도저히 그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코 그 역할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날 사로잡은 유일한 현실은 바로 어마어마한 비탄이었다." - 371p

책의 뒷부분에 있는 옮긴이 김수진의 <작품 해설>을 먼저 읽고 소설을 읽으면 좋겠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정보, 작품의 줄거리와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몰입해서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작품 해설을 읽으면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소설인지 또한번 감탄하게 될 것이다.

전쟁은 개인과 가족과 사회와 국민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긴다. 죽지못해 살아가는 지옥같은 삶터에서 결국 죽음이라는 도피처를 결정할 때까지 서로 할퀴고 난장판으로 미치게 만든다. 지금 아프간을 점령한 탈레반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탈레반의 영향력이 마치 이 소설에 나오는 안드레아의 외갓집 분위기일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침묵하면 안된다. 어떻게든 도와야한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날 아침 나는 실제로 아팠다. 열여덟의 나이에 부딪쳐야하는 지난하고 처절한 어두움을 통과하느라 견디고 버텼을 주인공 안드레아의 아무것도 없었던 그 1년이라는 시간이 몸살을 앓게 만들었다.

"죽은듯이 잠을 잤다." 이런 표현들이 너무 정당하게 다가왔다. 마치 내 인생의 모든 고통을 축약시켜 놓은 듯 이 작품은 나를 아프게 흔들었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현실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 아침이었다. 악랄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설속에서 빛을 보았고 희망을 만났다.



🔖문예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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