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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ㅣ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평점 :
<노자 도덕경>은 이용주 학자가 정성 어린 해설을 담은 역작이다. 보통 철학 원문 해설서는 두께와 빽빽한 텍스트 때문에 읽기가 버겁다. 하지만, 이번 "이학사"에서 출판된 <노자 도덕경>은 번역-원문-독음을 보기 쉽게 편집해서 독서에 큰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이용주 학자는 어려운 용어로 해설하지 않고, 문외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간편한 문체를 사용했다. 제법 두꺼운 철학서이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노자는 우선 '도'가 어떤 것인지 말한다. 물론 노자는 '도'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용주 학자는 이런 해설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도'란 무엇인가? 도는 어떤 초월적인 장소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인가? 아니면 도는 항상 '사물의 도'로서 구체적인 사물과 존재하는가? '도'는 그 제는 항상 존재한다. 동시에 그 도는 '만물의 도'로서 존재한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도는 '일자'이면서 동시에 '다자'다. '일즉다. 다즉일'의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나와 네가 다르고, 개와 고양이도 다르다. 서로 다른 '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노자는 어떻게 일자 이면서 다자라 말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단순하다. 서로 다른 '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같은' 도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저자의 말을 빌려보자면, 우린 "생명의 도"를 공유하고 있다. "다르지만 동시에 모두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유튜브 <충코의 철학>에서 이용주 학자의 인터뷰를 들으면, 학자들 사이에서 <도덕경>이 정치적 해석과 도덕적 해석으로 갈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단순하게 한 쪽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이것이 고전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인터뷰를 들으면서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평생에 걸쳐 조금씩 도덕경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실천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게 된다."
위무위, 즉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
"인위적인 작위, 함부로 개입하고 간섭하는 정치, 즉 '망작'의 정치를 할수록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법이 번잡해지고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세상은 더욱더 혼란으로 빠져든다. 문제가 생겨도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다. 이럴 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손을 대면 댈수록 더 꼬인다. 규칙과 제도가 너무 복잡하고, 규칙과 제대로 규제하려는 현실도 너무 복잡해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물론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노자는 어떤 무위, 즉 '손을 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일까? 복잡한 현대 세상은 이미 많은 손때가 탔다. 노자가 말한 '도'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이 바랜 거 같다.
66장은 "무위정치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정치에 관한 구절 중 제일 인상 깊어서 전문을 실어 보겠다.
1)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이유는
아래로 가는 것을 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다.
2) 따라서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
반드시 말을 그들 아래에 둔다.
또 백성의 앞에 가려고 할 때
반드시 몸을 그들 뒤에 둔다.
3) 따라서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은 무겁게 여기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은 해롭다 여기지 않는다.
천하는 기꺼이 그를 추대하고 미워하지 않는다.
4) 그는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무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사회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위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국민(백성)에게 과도한 제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지도자가 있지만 느껴지지 않고, 질서가 있지만 엄격하지 않고, 규제가 있지만 과도하지 않는 것. 그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의 정치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무위의 통치를 실행하는 성인의 정치는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거나, 통치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백성은 기쁜 마음으로 그를 통치자로 받들고, 그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
동양철학의 묘미는 "치우침이 없다."에 있는 것 같다.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명쾌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그 또한 편파적이면 안 된다. <도덕경>은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읽는 고전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혐오가 가득 찼다. 여기저기 뻗치는 손길은 사람의 분노를 키우고, 혐오를 가지게 만들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조금 더 예민하게 말해볼까?
여당은 야당을 죽이고, 야당은 여당을 죽인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혐오하고 사랑을 잃었다. 노자가 현대 사회를 바라봤다면, 이것이야말로 '망작'이라 하지 않을까?
<도덕경>은 읽기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용주의 <노자 도덕경>은 깔끔한 문체로 해설을 곁들었다. 이용주 학자의 해설은 현학적이지 않고, 현대인이 어떻게 하면 <도덕경>을 편파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지 고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1장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아도 좋다.(본인은 1장-6장까지는 순서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노자의 '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 수 있다.) 하루에 한 장씩 읽는 것이 좋겠다. 차근차근, 그것이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노자 도덕경>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