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학년 때였던가? 학교에서 처음 보여줬던 <나니아 연대기>가 생각나는 책이었다. 영화 속에서 벽장을 열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내 옷장에서도 그런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붙박이장들을 열고 그 속에 숨어 엄마한테 몇 번 혼났던 기억이 있다. 역시 인생은 영화가 아니다.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속에서도 그런 벽장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이 벽장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아니었다. 현실의 무거움을 잠시 내려둘 수 있는 도피처였다. 벽장에 들어갔다 나와도 그 무게는 전혀 줄지 않지만..

이 책에서는 제목과 같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격리하게 된 평범한 어른 우식, 그런 우식과 동업을 하는 마태공, 1980년대 전쟁을 피해 격리된 소년 조기준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개인적으로 순서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읽기 편하다 느끼는 터라 인물들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게 약간 어렵게 느껴졌다.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다보면 현실에서도 겪기 쉬운 딜레마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성선설, 성악설 무엇을 따를까? 같은 생각부터, 우식의 삶을 보며 나만 아파 격리되는 게 나을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격리되는 게 나을지 같은 생각이나 마태공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아이가 사건 속의 가해자인 게 나을까? 피해자인게 나을까? 그런 답이 없는 질문들 말이다.
이런 딜레마들에 생각하다보면 인간은 ‘나’만의 고통보다 ‘모두’의 고통에 오히려 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나 역시 바이러스를 안고도 죄의식 없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끓고 있는 사과 잼을 한입 맛본다. 델 것을 알면서 입에 넣는다. 아찔하게 뜨겁고 달다. 반성은 그렇게 짧고 뜨겁게 지나간다. 아마 나는 조기준을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다. 이 페이지는 접힌 채 다시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생각하고 묘사한 책 같다. 책을 중반쯤 읽었을 때는 인간은 역시 성악설을 따르는 존재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책을 덮으면서는 이 말은 인간은 노력하면 선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겁낼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으므로 현실에서 최대한 평온에 가까워지는 길을 택하는 게 이 세상을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 같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