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퇴사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유독 자주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수능 준비하면서 공부하기 싫을 때 저 문구를 생각했다. 최선을 다하고자가 아닌 낙원 있을지도? 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공부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낙원은 정말 없었음을 깨달았다. (공부를 했었어도 낙원이 어딨는데! 했을 테지만ㅎㅎ) 그래서 무분별하게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저 문구를 떠올리고 버티고 버틴다. 한계점이 어디까지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강성봉 작가의 <파사주>는 표지부터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파사주라는 제목이 불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문을 표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파사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틀과 한계를 깨부수며 스스로 개척해가는 생의 여로(passage)와 같은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등장하는 유림과 해수는 ‘하나의말씀’이라는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다. 보살핌만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이 보육원은 보호를 가장한 착취의 현장이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겪은 착취가 당연한 줄 알고 살아간다. 그리고 아이들은 매일 뉘우친다. 본인이 지은 죄가 아닌 부모가 지은 죄를. 그 죄가 본인의 잘못이었던 것처럼 대신 뉘우치고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 죄를 짓지 않은 이가 구원을 구하는 이상한 현상. 현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착취 방식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책 속에서는 조금 더 자극적으로 그 죄에 대해 뉘우치는 말이 나온다. 그 말들과 보육원의 존재 이유를 같이 떠올리게 되는 순간 열이 절로 뻗친다. 분노가 차오른다.책 바깥의 나는 그저 분노하고 괴로워만 하지만 책 속의 유림과 해수는 괴로운 순간들이 담긴 보육원을 떠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유림과 해수가 떠나지 않고 그 곳에 여전히 머물러있었다면? 부모의 죄로부터 용서를 받고 아버지 선생님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파사주>를 읽으며 깨달은 삶의 당연한 순리는 구원은 내가 내게만 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구할 수 없고 또 내가 타인을 구원해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도망쳐야할 때를 알고 도망치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도망이 아닌 유일한 빛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꽤나 우울하고 엄청 화가 나는 내용의 연속이지만 이들을 보며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