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는 유쾌한 할머니들
김재환 지음, 주리 그림 / 북하우스 / 2020년 9월
평점 :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재환은 [트루맛쇼] [쿼바디스] [미스 프레지던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 [칠곡 가시나들]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칠곡의 할머니들의 이야기와 시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이다.
아무래도 영화 제목부터 감독 이름까지 생소한 걸 보니 분명 작가가 만든 영화를 나는 한편도 보지 않았나보다. 물론 [칠곡 가시나들]도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김준현의 말처럼 “아는 맛이 무섭다”고 했던가! 아는 내용이고 뻔한 내용일 것 같은데 막상 읽으면서 울다가 웃다가 또 웃다가 울면서 눈물 콧물 쏙 빼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칠곡 약목면 복성2리의 문해학교에 다니는 7명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쳐가면서 나이들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책에 담았다. 삶도 있고 죽음도 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으며, 엄마도 아빠도 나도 모두 담겨있는 책이다.
78p
설렘의 시작은 배움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배움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를 기다리는 건 어제와 똑같은 지겨운 일상뿐이에요. 시간은 무디게 흐르고 무료함이 영혼을 잠식하지요. 오직 설렘만이 나이 든 자에게 생기와 재미를 공급합니다. 재밌게 나이 들고 싶다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햐 해요. 글이든, 춤이든, 노래든, 아코디언이든... 당신이 스기야마든, 서울 할머니든, 부산 할아버지든......
할머니들은 구십이 가까워진 나이에 새롭게 한글을 배우고자 문해학교에 모였다. 누구든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거, 모르는 것을 배워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렵기도 하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팔십이 훨씬 넘은 연세에, 연필이라도 잡을라치면 손 떨리는 그 나이에 한글 배우기를 도전하셨으며, 배우는 걸 삶의 재미로 여기셨고 나이듦의 하루하루를 즐거움으로 만드셨다. 재미있는 인생, 즐거운 인생의 첫 번째 조건은 두려움을 떨치는 것, 용기를 내는 것임을 가르쳐주신다.
137p
서른일곱에 혼자 되고
죽자 살자 살다보니
구십이 되었잖아 내가 진짜 구십인가
젊은 사람들에게 이 말 하고 싶어
걱정 마라 죽을 일이 나면 살 일도 생긴다
황용현 [내 속이 시원해요]
구십이 넘으신 할머니의 시에는 그냥 툭 던진 말 속에 뼈저림이 있다. 항상 살면서 “아 죽겠다.” “힘들다” “못해 먹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 등 투덜거리면서 불평불만을 내뱉기 일쑤다. 이런 나에게 할머니는 죽자 살자 하다 보니 구십이 되었단다. 죽을 일이 나면 살 일도 생긴단다. 이렇게 삶을 통찰하시다니 그동안의 불만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할머니들은 늘 죽음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삶을 이야기하시며 그 안에는 그들의 하루하루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내 나이 마른 다섯 보다 훨씬 젊디 젊은 서른 일곱에 혼자가 되어서 살아오신 삶이 어느새 구십이 되었다니 살다 보니 살아진다는 할머니의 삶의 철학이 인생으로 보여진다.
장하다 우리 딸
김춘남
오늘은 문해학교 입학하는 날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우리 아들 입학식 때 손잡고 갔던 학교를
엄마도 없이 나 혼자 갔어요
장하다 우리 딸! 학교를 가다니
하늘나라 계신 엄마 오늘도 많이 울었을 낀데
엄마! 울지 마세요
춘남이 공부 잘 하겠습니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서명도 못하냐고 무시하던 택배 아저씨도
이름도 못 쓰냐고 눈 흘기던 은행 아가씨도
우리 엄마한테 혼났을 낀데
언젠가 하늘나라 입학하는 날
내가 쓴 일기장 펴놓고
동화책보다 재밌게 읽어드릴게요.
아! 이 시에서는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놔버렸다. 누군가의 딸로써 나이 드신 엄마도 있고,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셋이나 있는 나에게 엄마란 이름은 늘 마음을 시리게도 하고 꽉찬 뭉클함을 주는 어쩌지 못할 단어다. 구십 넘은 할머니에게도 엄마란 이름은 한없이 자신을 아기로 만드는 든든한 명함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넘쳐오는 눈물은 어쩌지 못하리라.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긴 그녀들, 영정사진을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찍을까 머리 맞대고 막내딸과 상의하는 그녀들, 앞으로의 꿈은 어떻게 하면 곱게 죽을 수 있는 것이라는 그녀들도 엄마가 있으며,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을 쏟는다는 게 내 가슴을 한없이 먹먹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내 모습도 같고, 내 아이들의 모습도 같았기에.
할머니들의 좌충우돌 한글 깨치기, 전국노래자랑 출전기, 소풍가는 날, 생전 처음 영화보기(처음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라니 대단한 플렉스다) 등의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과 동시에 그녀들은 독자에게, 관객에게 죽음과 삶은 떨어져 생각할 수 없으며,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재미있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죽음을 항상 생각하면서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이 보다 치열하게 의미있게 살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시한 놀이, 미미한 재미, 소소한 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 삶은 시시하지도 미미하지도 소소하지도 않은 재미있게 의미있게 사는 삶인 것이다.
오늘 밤엔 [칠곡 가시나들] 영화를 보고 자야겠다.
이 책은 출판사 협찬받았지만, 제 개인적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