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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불편한 용서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mimeene/222087166595
엄마가 떠났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다. 엄마가 우리를 떠난 이유였던 그 남자는 얼마후 엄마의 세 번째 남편이 되었다. 우리 자식들은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
나는 한 번도 무례하게 엄마를 힐난한 적이 없었고, 대놓고 증언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를 향한 나의 무력감에서 탄생한 소망, 언젠가 엄마가 벌을 받으면 좋겠다는 소망, 내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신이 그녀에게 복수해주면 좋겠다는 소망은 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내 과거를 떨쳐낼 수 있을까? 그런 해방이 정말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까지? 나는 정말로 엄마와 작별을 고할 수 있을까? 내 출생을 무거운 모래주머니처럼 벗어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의 고통을 내 아이에게 떠넘기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 불편한 용서 / 스베냐플라스퓔러 / 나무생각
작가는 위의 물음으로부터 책을 시작한다. 유년시절 나를 떠난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용서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일까?를 질문한다. 그러면서
- 용서는 이해한다는 뜻일까?
- 용서는 사랑한다는 뜻일까?
- 용서는 망각한다는 뜻일까?
용서를 알고, 엄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해, 사랑, 망각이 용서와 같은 말일 수 있는지를 찾아 떠난다.
우리는 쉽게도 말한다. "죄송한데요." "죄송합니다만." 뭘 그렇게 사과할 게 많은지 하루에도 몇번 씩 습관적으로 말한다. 이 말에는 "괜찮아요."즉 내가 미안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인지 나조차도 의문을 품게 된다.
작가는 일단 엄마를 이해하는 방향에서 글을 시작한다. 엄마는 생각해보면 칭찬받아 마땅한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다. 폴 고갱이 그림을 위해 가족을 떠났듯 엄마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가족을 떠났다. 그러나 폴 고갱과 엄마의 평판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왜 여자라는 , 엄마라는 이유로 집에 갇힌채 가족을 위해 희생과 봉사만을 강요하는지 사회적인 시선으로 눈을 돌려본다. 그러면 엄마의 행동은 참으로 자기애가 강한 주체적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다. 그렇다고 한든 작가는 엄마이기에 엄마를 용서할 수도 없겠고, 엄마를 기다리고 바랬던 수많은 시간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럼 사랑은 용서인가?
엄마가 나를 위해 쓴 육아일기를 보았다. 엄마가 절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확실할 수 있었다면 엄마를 증오하고 엄마와 완전히 인연을 끊기가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에 결쳐 끈기 있게 내 책에 적어넣은 한결같은 글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도 깊은 애정이 나를 덮쳐왔다.
말없는 가출, 우리를 대하던 그 냉기, 집을 나간 후 우리에게 “너희가 원했잖다!”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전달하던 엄마의 자기 정당화, 그 모든 것이 엄청난 착각은 아니었을까?
조금 불편한 용서 / 스베냐플라스퓔러 / 나무생각
작가는 엄마가 차라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엄마를 증오하고 완전히 인연을 끊는다는게 쉬웠을거라고 한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알기에 더욱 혼란스럽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엄마를 용서하기엔 말없는 엄마의 가출과 냉담한 태도는 가슴에 비수를 꽂았으며 쉽게 잊혀지지 않음이다.그리고 엄마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괴로워하기를 바랬다. 이는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부채상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해도 사랑도 아니면 용서는 망각인가?
‘망각’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하고 필수 생존 전략으로 선언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망각이란 “하나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억제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억제력은 우리의 생각을 해방시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치르는 싸움을 이겨내고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한다고 했다.
니체가 보기에 망각은 자기통제의 한 형태다. 자신을 괴롭히며 되돌아보고, 그렇게 하여 자유로운 현재의 체험을 방해하는 것을 막아주는 자기통제인 것이다.
조금 불편한 용서 / 스베냐플라스퓔러 / 나무생각
망각은 자기 통제의 형태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현재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 생각들을 막아주는 것이다. 결코 망각에 의한 용서는 있었던 일 자체를 잊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았던 일은 고스란히 기억속에 묻어둔다. 다만 보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인데, 용서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는 일이 되거나, 결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용서로 인해 보상을 받는 다는 건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가 망각으로 이해될 수 있는건 그냥 잠시 힘든 과거의 죄를 잊는 것이다. 이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난 널 용서해."하고 말 한마디로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가해자가 회개를 하고 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서도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단지 용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행동으로 천천히 스며들 듯 보여지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용서를 구한단 말인가. 용서한 들 있었던 일이 다시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냥 힘든 마음을 잊는 망각이 가장 용서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용서란 잠시 잊는 것이다.
작가가 가족모임에 초대한 엄마를 기다리고, 웃으면서 반갑게 맞이하듯 용서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엄마가 준 상처는 잊지 않고 고이 간직한 채 잠시나마 잊는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살 수 있기에.
용서에 대해 프리드리히 니체, 한나 아렌트, 르쾨르, 자크 데리다가 말했던 것들을 인용해 자신의 엄마에 대한 마음을 파헤치고 용서란 무엇인가에 도달한 [조금 불편한 용서]는 제목처럼 조금 불편할수도 아니 많이 불편할 수도 있는 책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게 되는 용서의 정의와 감성 그리고 그 의의에 대해 알아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소재가 되어 그 깊은 곳의 내밀함까지 들어가 파헤친 용서는 꼭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