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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담 - 스마일 화가와 시크한 고양이의
이목을 지음, 김기연 사진 / 맥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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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담, 꺼내어 말할 용기와 그것을 들어줄 여유

 

 

 

 

 

 

이따금 추억팔이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간혹 그런 밤이면 나는 쵸재깅닷컴에 접속한다. 요즘이야 인스타그램이나 페북이나 이런저런 세계적인 SNS들이 진짜 많이 늘었지만, 이천 년대 초중반 한국에서 미니홈피가 누렸던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수많은 일촌들이 그대로 동면하고 있는 곳. 미니홈피에 접속하는 일은 흡사 방 한 귀퉁이에 먼지 쌓인 비밀 박스를 열어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에서 오는 감동의 무게가 조금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비밀 박스에는 없고, 미니홈피에는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디서 어떻게 뿜어져 나온 건지 그 출처조차 불분명한 감성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중2병이라고 부른다.

 

관심받고 싶어서, 인간이 가장 감성적인 새벽 2시라서, 혹은 그냥 그대로 미쳐가고 싶어서든 그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참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중2병들이 양산되었다. (지금도 조금 그렇지만)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니홈피 프로필이며 다이어리며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기가 차는 글들이 넘쳐난다. 술에 만취된 다음 날 핸드폰 통화목록을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옛날 글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많이 두렵다. 그야말로 흑역사들이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많던 중2병 환자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의 감성은 왜 중3 혹은 고1이 되지 못하고 다 자퇴해버린 걸까? 그러니까 그 글과 사진들은 왜 작성자의 손에 의해 비공개가 되거나 삭제될 처지에 놓인 것인지 말이다.

 

<청춘만담>이라는 에세이를 한 권 선물 받았다. 저자인 김경애씨가 감사하게도 손수 보내주셨다. 책은 자신을 '시크한 고양이 체셔'라는 닉네임으로 말하는 스물여섯 김경애씨와 자신을 '캡틴 스마일'로 불러달라는 50대 화백 이목을씨의 문답으로 이어진다. 보통 질의응답에서 중요한 것은 답변보다도 질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리, 유명인사라도, 질문이 어처구니없다면 답변은 읽을 필요도 없다. 외국 유명인 앉혀놓고 주제와도 상관없는 두유노우싸이? 두유노우김치?를 연발하는 기자들을 생각해보자. 참 암담하지 않던가? 최소한 이 책, <청춘만담>은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에서 내 머리를 둘로 쪼개는 듯한 깨우침이나 그 어떠한 번뜩임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고 일상적인 주제들로 책장이 넘어간다.

 

<청춘만담>을 쓰면서 저자이자 '시크하고 싶었던 고양이', 김경애씨가 얼마나 많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들춰 보았을지 상상이 된다. 청춘의 대표자가 되어 고민을 멘토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녀도 나름대로 고민이 참 많았을 텐데, 역시나 가장 진솔한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택했나 보다. 사실 내용만 봐서는 이게 어떻게 직장인 스물여섯이야 싶기도 하다. 이 책의 고민들은 지금의 스물여섯 김경애씨보다는 과거의 김경애씨 비중이 더 크지 않았을까?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굉장히 말랑말랑하고 감각적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기억의 재구성을 거친듯한 에피소드들이 굉장히 많이 추억된다. 출판사 에디터라는 직함답게 유려한 글솜씨가 아니었더라면, 자칫 <청춘만담>도 그저 그런 중2병 SNS의 진일보 정도로 남을 뻔했다는 느낌도 살짝 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경애씨의 질문들이 소녀의 감성을 지녔었기에 멘토 이목을씨를 만나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소녀감성은 커녕, 또래인 김경애씨의 질문을 그저 어리광, 혹은 오그라듦으로 치부해버리는 나 같은 사람이 멘토였다면 아마 <청춘만담>은 출판될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목을씨는 <청춘만담>의 곳곳에 등장하는 자신의 스마일들을 그릴 때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아무렇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진다. 한 분야의 대가가 된다는 것은 출발점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결국 자신의 도착점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답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겁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격식 없이 잘 들어주고, 담백하고 쾌활하게 대답한다. 그럼 그걸로 끝이다. 어쩌다 보니 식상한 표현이 되어 버렸지만 진짜로 진정성. 그로 인해 <청춘만담>은 다른 중2병들과는 다르게,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커나갈 수 있었다.

 

들어줄 여유가 있는 것, 그리고 꺼내어 말할 용기가 있다는 것. 글을 쓰는 젊은이와 그림을 그리는 대가의 문답, 아니 만담 속에서 그러한 점들이 참 부러웠다. 우리가 과거에 썼던, 그리고 지금도 쓰고 있는 중2병 게시물들을 자꾸 비공개하고 삭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허세롭고 오그라드는 글들마저 진지하게 받아주고, 또 답해줄 그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 미니홈피에는 중2병에 걸린 채 동면하고 있는 글들이 수십 편이다. 그 글들에 담겨있던 생각들도 언젠가는 이 책 <청춘만담>처럼, 관심을 가져줄 누군가를 만나 깨어나고 자라나길 바라본다. 내 학력은 일단 학사에서 끝났지만, 생각들은 석,박사학위까지 못 가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멈추지 않아. 시계는 멈출지언정 시간은 멈추지 않지. (중략) 어쩌면 인생은 나뭇가지 위에 잘 매달려 있는 저 시계처럼 시간에 잘 매달려 있는 것이다." -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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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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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우리도 빅브라더를 지켜볼 것이다


 

 

  

 

지난 금요일,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마친 후 복귀 2일째되는 날. 쌓여있던 메일이며 포스트잇 등을 다시 확인하며, 내 손을 떠나갔던 일거리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업무의 긴장감이 나쁘지 않았다. 노는 것도 좋지만, 역시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구나 싶었던 그날 오후. 갑자기 날아온 문자 하나가 나와 부서의 모든 산통을 깨 놓았다.

 

문자의 내용인즉슨, 다음 주 화요일부터 4일간 '동불훈련'에 참가하라는 것이다. 제목, 일시, 장소만이 아주 간결하게 적혀서 날아온 이 문자. 처음엔 잘 못 온줄 알았는데. 느낌이 좋지 않아 전화를 걸어보니 결코 이 문자는 잘 못 보낸 문자가 아니란다. '동불훈련'이란 예비군 동원 훈련 불참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30시간의 교육을 의미한다고 한다. 응? 잠깐...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나는 올 해 동원 훈련에 관한 어떠한 공지도 사전에 받은 기억이 없는데, '동원 불참자'라니? 전화를 받은 병사에게 따져 물으니, 병사가 말한다. 선배님께서는 올 해 무단으로 동원 훈련에 불참하셨다고, 향방 작계도 안 받으셨고, 또 뭣도 안 받고... 분명 공지를 했는데 선배님이 응하지 않은 거라고. 이번 훈련에 정당한 사유 없이 불참하시면 그에 따른 불이익이 있을 거라며 은근슬쩍 경고까지 한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병사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는 병사에게 그러지 말고 간부를 불러달라 요청했고, 곧 전화기에 동대장이란 아저씨가 나타났다. 다시 한 번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동대장이 내게 말했다. 사실은 나의 말이 맞단다. 올 해 한 번도 동원 훈련이나, 기타 예비군 관련 훈련에 대한 공지를 준 적이 없단다. 단, 군 시절 땅굴탐지병이었던 나의 특수한 주특기번호 때문에, 어느 기수에 동원 훈련을 보내야 할지 머뭇머뭇하다가 여름이 다 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원 불참자란다. 와서 훈련을 받으셔야 한단다. 

 

이게 뭐지? 일처리를 이상하게 해놓고서, 그냥 까라면 까라는 군대식 문화가 전역 후까지 나의 발목을 잡을지는 몰랐다. 볼멘소리 몇 마디 전화로 건넨 게 나의 화풀이의 전부다. 이 아저씨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그래 아주 고맙다. 덕분에 추석 포함해서 3주를 쌩으로 놀게 생겼구나. 내 탓도 아니지만 월요일에 부서장에게 가서 또 휴가 좀 내야겠다고 얘기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하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나라의 뜻이란다.

 

 

 

 

 

 

과연 개인이 이길 수 있는 권력이란 것이 존재할까? 해외사정은 잘 모르니까 국내 한정으로만 이야기를 해보자.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부터, 스무 살이 넘어서 갔던 군대, 그리고 다시 나와서 대학교, 갑과 을의 직장, 입까딱 잘못 놀리면 순식간에 빨갱이로 돌려버리는 현실 정치 속 우리 사회, 빅 브라더인지 빅 시스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표자 한 명을 위시하고 그 뒤로 똘똘 뭉쳐있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권력의 행보들까지. 선거철이면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겠다 나서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민생이 아닌 권력의 왕관일 뿐이다.

 

아무튼 진짜 많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권력의 집합체들은 대충 꼽아도 저만큼이나 쏟아진다. 우리는 저들이 내세우는 '공통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고, 그 명목 아래 통제 받고, 매 순간 검열당하고 있다. 최근 그 권위에 도전했던 자들중 기억에 남는 '승리자'의 얼굴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공부, 또 공부를 외치며 자식들이 다른 방식의 헛된 노력 대신 주류사회에 동화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었다. 분명 소설인데 한 장, 한 장의 무게감이 아주 묵직했다. 결코 빠르게 읽어내릴 수 없었다. 이야기 자체의 즐거움보다 등장 인물 '윈스턴 스미스'의 갑갑한 하루하루의 고뇌에서 느껴지는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책의 마지막, 작품 해설을 읽어보면 <1984>는 분명 1948년, 스탈린 시대의 소련식 전체주의의 미래를 비판하며 썼다는데, 2014년의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나는 왜 <1984>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을까? 여기가 분명 북한은 아닌데 말이다. 소설 <1984>에서 비치는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다 타고 남은 잿빛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

 

저 무시무시한 당의 슬로건부터 매 순간 바꿔치기 되는 통계와 뉴스,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는 텔레스크린 속 빅브라더, 사상경찰과 반역자 골드스타인의 존재까지 <1984>속 통제의 장치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정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인간의 무리가 개인으로써의 인간을 통제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조지 오웰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교육을 통한 사상의 주입, 공포정치, 언어 및 문화의 제한 등 이 모든 요소들은 우리 인류가 역사 속에서 자행했었고, 또한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자행중에 있다. <1984>속에서 결국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인간' 윈스턴 스미스와 줄리아처럼 어디선가 이름모를 '마지막 시민'들도 무너져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984>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느냐며 조지 오웰의 상상력에 감탄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되려 생각해본다. <1984>는 조지 오웰의 상상력이 빚은 근미래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던 그 시대 자체이지 않았을까? 스탈린의 전체주의만을 비꼰 것이라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은 그저 그 시대의 모든 권력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금의 2014년과 <1984>가 참 많이 닮아있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그래서 역사도 수레바퀴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나빠질 디스토피아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지나간 1884년, 1948년, 1974년, 1994년도 그리고 현재 2014년과 어쩌면 미래의 2024년도 결국은 다 <1984>안에 있던 것이다. 


<1984>를 읽고 나니, 장난 같던 귀요미송도 살짝 무섭게 들린다. 1 더하기 1은 귀요미, 2 더하기 2는 귀요미, 3 더하기 3은 귀요미. 귀요미, 귀요미... 참을 수가 없다. 2 더하기 2는 5다. 오브라이언이 말했다. 권력이 까라면 까는 거다. 뿐만 아니다. 권력은 세뇌에서 그치지 않고 언제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겠다고 으름장까지 내놓는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 


하지만 우리 속담에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는 빅 브라더의 눈이 꼭 시민들을 감시하는 독재자와 권력의 눈이란 법은 없다. 텔레스크린의 수보다 더 많은 우리 브라더들의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자. 그 눈을 감지 않는 한 언젠가는 우리 시대에도 정의가 찾아올 것이라 조심스레 믿어본다. 비록 나는 다음 주 동불훈련에 참가하더라도, 줄리아와 스미스의 나른한 한때를 또다시 잃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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