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들
정영수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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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빨간 날이 검은 날보다 좋은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쉬지 않고 한 시간은 너끈히 이야기할 수 있다. 입에서 나가는 대로 모든 문장이 타당한 이유가 된다. 빨간 날에는 푹 잘 수 있다. 빨간 날에는 떠날 수 있다. 빨간 날에는 진탕 마실 수 있다. 빨간 날에는 늦은 밥을 먹을 수 있다. 한쪽으로 미뤄둔 『2666』을 꺼내 읽을 수 있다. 읽다 말고 다시 잠들 수 있다. 깨어나서 온종일 게임할 수 있다. 빈둥댈 수 있다. 굳이 원한다면 쌓아둔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다. 신구대 운동장을 빙 둘러 달리거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거나,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1리터씩 들이붓는다거나.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쨌든 빨간 날은 끝내준다. 검은 날의 루틴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의외성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검은 날의 숫자는 빨간 날에 비해 압도적이다. 일상이라는 단어 앞에 붙는 수식어는 보통 '새로운', '신나는'이 아닌 '지루한', '지긋지긋한'이다. 금토일이 붉게 타고난 자리에 월화수목금이 검게 그을려 있다.

그렇다. 생(生)은 기본적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각자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떠내려간다. 무얼 타고 내려가도 목적지가 달라지는 일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무기력해진다. 허무한듸! 하고 읊어보기도 한다. 채워질 독 같은 것이 내게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말이다. 검은 시간의 망망대해 위에 떠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멍해진다. 멍해지고 멍해져서 다음에는 멍청해진다. 결국 지루함과 싸우는 게 평생의 과업이 된다.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패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일. 우리는 지루함을 견뎌내기 위해 '뭐'라도 되어보려 하거나. '뭐'라도 나타나길 기도한다. 진짜 '뭐'같아도 그나마 '뭐'때문에 산다. 정말로 하늘 위에 신이 존재한다면 내려다 보기는 할까? 이런 인간들의 눈물겨운 아등바등을. 빨간 날이 아닌 검은 날을 위한 아등바등을. 

소설집 『애호가들』속의 인물들 역시 각자의 '뭐'에 의지하며 생을 이어나간다. 번역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현실을 자위하는 번역가(「애호가들」), 수면제와 낭독 모임으로 숙면을 청하는 편집자(「하나의 미래」), 로큰롤 스타를 꿈꾸었던 왕년의 음악 청년(「음악의 즐거움」), 그리스 비극을 줄줄 외우는 단순 반복 업무 노동자(「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그리고 기타 등등. 이들이 가진 '뭐'에 대해 타인들은 관심이 없다. 이들도 잘 안다. '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자신이 만들어낸 '뭐'를 믿고 따르는 것도 온전히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소설집이 재미있는 것은 '뭐'가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르고, 그놈의 '뭐'때문에 웃픈 상황으로 내몰리는 주인공들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서만큼은 신이 존재했다손 치고) 신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인공들을 크나큰 손으로 '탁!' 쳐서 "억!" 하게 만든다. 신보다 '뭐'의 존재를 더 믿는 이들의 괘씸함에 실력을 행사한다.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이르게 되기까지 누구 하나 각자의 '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믿기로 했으니 그저 믿고 행한다. '뭐'가 지루함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것임을. '뭐'를 만나면 비어 있던 삶의 연결 고리가 채워질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뭐'?

결과적으로 '뭐'가 뭔지에 대한 질문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소설을 읽는 이에게 오롯이 떠넘겨진다. 소설집 『애호가들』은 말하자면 '뭐' 그런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재밌어서 아등바등 읽어버린. 그게 '뭐' 대단한 이야기였나... 하고 생각했었음에도 내게는 '뭐'처럼 다가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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