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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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쇼! 내가 아는 러시아어는 하라쇼가 전부다. 한국어로 좋다. good. 러시아에서 출장 왔던 엔지니어 코를로프가 내게 가르쳐준 표현이다. 코를로프는 나이 많은 엔지니어다.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엔지니어라면 대부분 관리직으로 빠지거나, 흘러간 옛 기술에서 멈춰있다는 편견이 있다. 러시아의 나이 많은 엔지니어는, 적어도 코를로프는 그렇지 않다. 그는 직접 개발하고 테스트한다. 자부심을 가지고 주어진 일들을 해내고 만다. 하라쇼. 정말 하라쇼한 엔지니어다. 그에 비하자면 나는 나이도 많지 않지만, 여러모로 하라쇼한 엔지니어와는 거리가 멀다. 코를로프와의 대화는 주로 영어로 이루어졌다. 술자리가 아니고서는 그다지 많은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코를로프는 한국의 젊은 엔지니어에게 뭐라도 말해주고 싶어 했지만, 나는 러시아의 늙은 엔지니어와 세 마디 이상 이어나갈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입으로 나가면 토막 난 단어들이 되어 나갔다. 나의 영어는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서야 술술 나왔다. 등심을 구우면서 엠마뉘엘 카레르의 소설 『리모노프』를 아냐고 물어봤다. 소주를 들이켜며 에두아르드가 정말로 그런 미치광이인지 물어봤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말로 출근길마다 보드카를 마시는지, 러시안룰렛을 직접 본 적이 있는지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도 했던 것 같다.(마지막 질문은 안 했을 수도 있다.) 코를로프의 모든 답변은 하라쇼로 시작했다. 진짜로 하라쇼라 하라쇼인지, 알았소라고 하라쇼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난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하루 종일 묻고 싶었던 말을 했을 뿐이고, 그 말을 코를로프에게 전달했다는 자체에 혼자 취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코를로프는 나를 디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디마는 드미트리를 줄여 부른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코를로프는 내 러시아 이름으로 디마가 제일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나의 답도 하라쇼. 술잔을 부딪히며 하라쇼였다. 스파시바는 아니었다. 아, 정정한다. 내가 아는 러시아어는 하라쇼와 스파시바, 이 두 표현이 전부다.

코를로프가 출장 왔던 그 시기에 『내가 싸우듯이』가 나왔었더라면, 그리고 내가 「창백한 말」을 읽었더라면 나는 코를로프에게 좀 더 그럴싸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을까?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묻고, 사빈코프를 읽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까? 모스크바 사람들은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다. 출근길 한 손엔 보드카, 다른 한 손엔 문고본이라면 정말로 멋진 광경이 아닌가? 마지막 러시안룰렛은 스킨헤드로 대체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런 질문은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코를로프의 답변들은 역시나 하라쇼로 시작됐을 테고, 그 뒤의 말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물론 알아듣든 그렇지 못하든 코를로프와 내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왔고, 나와 코를로프 둘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비대칭일 수 밖에 없다. 더 알고 싶은 한 쪽이 또 다른 한쪽에게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코를로프라는 사람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교집합들. 그런 질문들을. 그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사람과 사람의 대화는 보통 그렇게 시작된다. 이는 정보의 비대칭이 점차 대칭에 가까워져가는 과정의 첫걸음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 소설을 읽은 어떤 사람의 취향을 탐구하는 것이라거나. 내가 『내가 싸우듯이』를 읽게 된 것은 정지돈의 소설이 볼라뇨의 그것과 가장 닮아있었다고 말해준 한 지인 때문이었다. 확실히 장의 단편들은 그랬다. 『리모노프』가 섞여있는 볼라뇨 같았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느낌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 소설집의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들의 단편들부터는 확실히 정지돈 같았다.(나는 정지돈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지돈과 나의 교집합이 점점 작아져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영화와 작가, 이론, 체제들이 주구장창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보의 비대칭. 그제야 느꼈다. 하라쇼! 이 책은 하나의 거대한 리뷰로구나. 정지돈이 보고 읽은 모든 것들이 재구성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소설의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의 말들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당연하다. 리뷰란 그런 것이다. 리뷰를 작성한 사람과 같은 작품을 읽지 않고서는 리뷰를 이해할 수 없다. 100% 이해가 간다면 그건 리뷰가 아니라 프리뷰다. 좋은 리뷰는 읽은 사람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요소들을 숨겨놓는다. 그리고 그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준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싸우듯이』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텍스트도 책의 끝부분에 수록된 「일기/기록/스크립트」 와 참고문헌, 찾아보기였다.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더욱 재미있게 읽도록 만들 커리큘럼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이번 생애에서 완전히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리뷰는 세상에 없던 소설이 되기도 한다. 내가 정지돈에게 스파시바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정지돈은 이런 소설도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만약 『내가 싸우듯이』가 러시아어로 번역되는 날이 온다면 코를로프에게도 꼭 한 권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코를로프가 다시 한국 출장을 오게 된다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러시아 사람들은 『내가 싸우듯이』를 어떤 소설로 읽고 있냐고? 작가 정지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아마도 코를로프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하라쇼. 블라블라. 그리고 다시 하라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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