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좋아한다. 20대를 그들의 앨범과 함께 보냈다. 무심한 듯 흘러가는 기타 리프, 많은 음절을 내뱉지 않아도 여운을 남기는 노랫말들, 어딘지 나사 하나 풀린듯한 보컬의 목소리. 나는 그런 것들이 참 좋다. 특히 2008년 8월에 발매한 5집은 내 인생의 명반으로 꼽는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 톤이라 따라 부를 수는 없지만, 가끔 샤워를 할 때면 잘 하지도 못하면서 5집의 트랙들을 허밍 하기도 한다. 아마 욕실 밖에서 듣는다면 어느 시골 노인의 곡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음음음으~ 음으음음~ 아, 이건 4집 타이틀곡이다.

음악과 별개로? 아니 음악 때문에 나는 작가 이석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글쓰는 시간들 때문에 새 앨범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쓰는 이석원은 행복해 보였다. 첫 책 『보통의 존재』는 에세이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색깔만 바꿔 재발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날개돋친 듯 책이 팔려나가고 있다. 아무튼 그랬다. 『실내 인간』이 주춤해서 금방 밴드로 돌아오려나 했었는데, 그것은 내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이기적이지만, 그리고 실제로 이석원은 콧방귀조차 뀌지 않겠지만, 그의 신보를 들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이런 기분이 바로 애증이겠지. 나는 모범적인 팬이 되지는 못할 듯싶다. 인간 이석원의 팬이 아니라, 그저 뮤지션 이석원의 팬일 뿐인가 보다. 음악 감상에도 영향을 미칠까 싶어 그의 책은 계속 미뤄두기로 했다.

그래서 이 책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이렇게 빨리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올해 신보가 나오기 전까지는 남겨두기로 한 이석원의 책이었는데... 이게 다 회사의 독서 통신 때문이었다. 우리 회사에는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받아 읽고 시험을 치르면 교육점수가 올라가는 프로그램이 있다. 책은 공짜다. 하지만 매번 재미없는 자기 계발서나 한물간 경영 서적들로 도배가 되어있어 나는 잘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곳에 올라온 책들 말고도 내게는 읽고 싶은, 또는 읽어야 하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3월은 조금 달랐다. 대상 도서 리스트에 이석원의 신간이 올라온 것이다. 순간 아주 잠깐 고민했다. "이걸 신청해야 해... 말아야 해...", 그러다가 이석원의 글을 좋아하는 회사 동기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동기는 깜짝 놀라면서 이건 완전히 대박이라고 했다. 빵 터졌다. 이 책을 이미 읽었던 친구였기에 나는 그런 반응에 솔깃했다. 그 친구는 도대체 이 책에서 무슨 문제를 뽑아낼 수 있겠냐고 했다. 소개팅, 포르쉐, 김정희라는 키워드를 들먹이며 예상 문제를 뽑아보더니 자기는 바로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줏대가 없는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럼 나도..." 하면서 신청해버렸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책을 검색해보았다. 그리고나서는 내심 양장본으로 도착하길 기대하게 되었다. 입으로는 작년 말에 나온 언니네 이발관의 싱글 첫 트랙을 허밍하고 있었다. 옆자리 후배가 흘끔 쳐다본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소음 탓인가? 이제 와 생각해보니 조금 민망해진다.

일주일 후, 회사로 책이 도착했다. 잽싸게 1층에 내려가 택배 박스를 가져왔다. 한 권인데도 묵직한 걸 보니 양장본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자리에 올라가 난폭한 커터 칼질로 박스를 개봉했다. 표지의 초승달도 좋았고 판형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웬걸... 마치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을 연상케 하는 이물질이 책 상단에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 처음 보는 기괴한 모양이었다. 양장본 작업을 하다가 마감 처리를 깔끔하게 못한 채로 책을 넣어버린 것 같았다. 이물질의 크기가 생각보다 꽤 컸다. 아니 도대체 출판사는 어떻게 확인을 하길래 이런 책을 보내는지, 또 서점은 포장할 때 책 상태라는 걸 확인조차 않는 건지. 분이 치밀어 올랐다. 웬만큼 부당한 일에도 그냥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성격이라 자부했는데, 잠깐 욱함이 올라왔다. 이걸 출판사에 따져야 하나, 서점 측에 따져야 하나 고민하다가, 교환 절차를 거치려면 배송기간 동안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가라앉히기로 했다. 아까는 난폭하게 휘둘렀던 커터 칼을 다시 쥐고 이번에는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섬세하게 이물질을 제거해 나갔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 손질이 끝났다. 회사 책상 위에 꽂아두고 바라보니 뿌듯해졌다. 피규어가 부럽지 않았다. 3월 초였다.


30일이 됐다. 봄바람 몇 번 불더니 거짓말처럼 3월 한 달이 다 지나가 버렸다. 독서통신의 시험은 매달 말일이 기한이다. 만약 그 안에 시험을 치르지 못하거나 혹은 과락 점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페널티가 있다. 책값을 고스란히, 아니 책값 + a 만큼의 금액을 월급에서 떼어가는 것이다. 동기가 내게 시험은 잘 봤냐고 물어봤다.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다. 이상하게 동기에게 죄책감도 조금 느껴졌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나는 딱 '금치산자'까지 읽었다고 답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책상 위의 좋은 장식품이었다. 표지에 초승달이 떠있는 책은 볼라뇨의 것이 아니고서야 미친 듯 읽어본 기억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꽂아둔 이후로 빼들지를 않았다. 3월 한 달 동안 6권의 책을 읽었는데, 정작 이 책은 왜 읽지 않았던 것일까? 뮤지션의 팬이라는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그나마 괜찮다고 여겨졌다. 명분이라 쓰고 핑계라고 읽으면 될 것 같다.

학창시절 나는 벼락치기에 강한 스타일이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내신까지는 그렇게 해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문제집보다 다른 책들을 많이 읽었었다. 언어영역 문제집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책을 성실히 읽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던 감독 선생님들도 꽤 있었다. 아무튼 내게는 하루만 읽으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3월의 마지막 날이 다 되어서 이석원의 책을 잡고 있자니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교복이 그리웠다. 돌아가고 싶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도 출근길 2호선이었다. 다행히도 작가 이석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글솜씨가 좋았다. 괜히 작가가 아니었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순식간에 절반정도의 분량을 읽어 버렸다. 교과서와 달리 예상 문제를 점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밑줄을 칠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책은 '이야기 산문집'이라는 해괴한 장르를 내세우고 있었는데, 내가 볼땐 이 책은 그냥 소설이다. 아무래도 '『실내 인간』에 이은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보다는 '『보통의 존재』에 이은 두 번째 산문집'쪽이 더 잘 팔릴 것 같았나 보다. 동기가 말했던 것처럼 소개팅이 나왔고, 포르쉐가 나왔으며 김정희가 등장했다. 어떻게 읽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굉장히 솔직했다. 상대방(김정희)에게는 왠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나라면 과연 이렇게까지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글이 내 사람들에게 상처로 다가가지 않을까? 주간지 기자를 하고 있는 친구가 떠올랐다. 지난주에 둘이서 청계천을 걷던 중 녀석이 내게 말했었다. "이런 고민은 진짜 처음인데, 내가 쓰려는 기사 때문에 피해자가 고통받게 된다면, 이 기사를 진짜로 써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그걸 잘 모르겠어. 너라면 어떻게 할래?" 그 친구는 지금 그 기사를 쓰고 있으려나? 아니면 꼭 써내야만 했을까?

업무시간 내내 책을 언제 다 읽지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결국 동기가 먼저 시험을 봤다. 책을 읽은 지 좀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던 내 동기는 80점을 맞았다고 했다. 결과 보고 후 시험 힌트를 전달해준 동기는 회식 자리로 유유히 떠나갔다. 퇴근길에 힌트를 챙기기는 했지만, 들춰보지는 않았다. 스포일러가 있을까봐. 저녁 7시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의 속도로 봤을때 퇴근길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지하철에서 다시 한 번 집중해서 읽었다. 포르쉐는 아반떼가 될뻔했다가 미니쿠퍼가 되었다. 책 읽는 지하철의 BGM은 언니네 이발관의 3집이었다. 이번에는 허밍으로 따라 부르지 않았다. 허밍 하는 시간마저 아꼈다. 결국 마지막 단대오거리역에 도착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책은 재미있었다. 다만 부작용이었을까? 언니네 이발관의 다른 곡들이 더 간절하게 듣고 싶어졌다. 12시까지는 아직도 3시간 넘게 남아있었다. 드라마틱한 결말을 좋아하기에, 시험은 11시에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컴퓨터가 있는 집 대신 출장으로 며칠간 가지 못한 헬스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트레이너가 오랜만이라며 방긋 웃어 주었다. 이런 헤픈 남자 같으니라고... 그의 잘빠진 근육질 몸매가 부러워 괜스레 심통이 났다.

꾸역꾸역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 접속하려 했는데, ID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하필이면 아이디가 회사 메일 계정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 바람에 비밀번호 찾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회사 계정으로 새 비밀번호를 날리는 순간, 내 돈 2만 얼마도 같이 날아가 버릴 판이었다. 이런 변수를 예상 못 했던 건 아닌데, 인생은 금물인데, 나는 늘 이렇게 일을 처리한다. 천성이 글렀다. 30여 번의 로그인 시도 끝에 겨우 접속에 성공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다양한 ID, 비밀번호 조합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다. 숫자 + 영어 + 특수문자 의 조합은 정말 강력했다.

드디어 시험을 쳤다. 75점. 동기보다 5점 낮은 점수였다. 과락이 70점이었으니 일단은 만족이었다. 예상대로 문제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나? 하는 식의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이석원을 앉혀놓고 이 문제를 풀게 한다면, 아마 그도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책이 이렇게 소비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싫어할 것 같다. 출제자가 김정희라 하더라도 말이다.


"뭐해요?" - 176p, 213p, 230p, 348p

그러게.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일기를 일기장에 안 쓰고 블로그 감상란에 적고 있는 건가? 시간은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이렇게 글을 써도 댓글도 달고 공감도 눌러줄 사람들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 글의 정체도 그냥 '이야기 감상문'이라고 해두자. '이야기 산문집'을 읽고 쓴 '이야기 감상문'말이다. 얼른 언니네 이발관 6집이나 나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다음 달 독서 통신으로 『보통의 존재』나 『익숙한 새벽 세시』가 올라오던가. 새벽 두시, 이 시간이면 오지은의 노래가 당겨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다. 과연 여자 보컬 허밍도 소화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문제의 답은 'O', 물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