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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전주는 오랜만이었다. 지난 주말 전북대 캠퍼스 앞에서 대학 동기 H를 만났다. 홍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시끄러운 거리였다. H는 어깨가 살짝 남는 진회색 코트에 카키색 면바지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택이 번쩍이는 뾰족한 구두 앞코부터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대학생은 아니었다. 회사원이었다. 나는 주말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H에게 물었고, 아니나 다를까 H는 오늘도 출근이었다고 말했다. 제조업은 쉬는 날이 마땅치 않다고
너스레를 떨며, 한 손으로는 차 키를 흔들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동그라미 네 개가 보였다. 아우디였다. 지난달에 뽑은
모양이다. 구두에 깔창을 집어넣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도 H의 키가 5cm는 자란 듯 보였다.
그래 봤자 170이 될까 말까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H에게 맞서 차 키 대신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갤럭시 노트5! 빠밤! 할부가
아직 21개월 남았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핸드폰. 거기에는 12월 교통카드 값으로 48,500 원을 빼가겠다는 카드사의 문자가 들어 있었다.
H는 늘 나보다 한 발씩 앞서갔다. 대학
동기지만 인생으로 따지면 선배였다. 입대는 1년이 빨랐고, 연애는 3년이 더 빨랐다.
분명히 술은 똑같이 마신 것 같았는데 졸업도, 취업도 빨랐다. 심지어는 결혼까지도. H는 입사 1년 만에 같은
회사 경리 아가씨와 결혼에 성공했다. 나는
그 결혼식의 사회를 맡았다. 신부의 나이는 21살이었고, 하객 사진 촬영에서 나는 여고 졸업 사진 이상의 그 무언가를 경험했다. 그날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H 부부에게서 딸이 태어났다. 정말이지 H는 속도마저 빨랐다. 현재 H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속에는 두 명의 H가 있다. 아빠 H와 H가 어르고
있는 아기 h. 나는 그 사진을 통해 첫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손톱만 한 네모칸 안에서 H는, H네 집은 언제까지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대학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날 밤도 시끌벅적한 호프집을 찾았다. 살짝
어두운 조명과 쿵쿵거리는 음악들, 스크린에 재생되는 EPL 경기. 맨유 또는
뉴캐슬. 그런 공간에서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들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H는 그런 공간을 좋아했다. 안주는 모둠으로 나오는 것 아무거나. 뭘 시켜도 어차피 기본 안주
마카로니보다는 못할 테니까. H가 본론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마카로니 접시를 다섯 번 정도 리필했을 즈음이었다. 놀랍게도 H는 많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안정된 직장, 단란한 가정, 그리고 한적한 지방에서의 생활. H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부러워 보이는 그 삶 속에서 H는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H는
너무 이른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어린 아내와 h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서로에게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다가, 그래도 네가 더 잘하라는 말 밖에는... 내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H네 집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언젠가는 H의 뒤를 밟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버스 편으로 나는 성남에 돌아왔다. 익숙한 지역,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여느 때처럼 몇 권의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널브러진 책들을 책꽂이에 하나씩 꽂아 넣다가 다시금 『축복받은 집』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뿔싸! 그제야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읽어버려서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이야기들이, 나와 H, 그리고 H의 아내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었는데 하면서
말이다.
『축복받은 집』은 예방접종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집이었다. 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올 때의 따끔함,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체내에 퍼져가는 적당량의 항원들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더 많은 항체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들. 작가는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그 찰나의
아픔들에 집중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축복받은 집』이라는 제목이 영 와 닿지 않았다. 주인공 부부는 서로의 아픔을 들춰내기 바빴고(「일시적인
문제」), 자식들 중 한 명은 알고 보니 혼외 자식이었으며(「질병 통역사」), 불륜을 일삼거나(「섹시」),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센 아주머니의 집」, 「진짜 경비원」) 단편들이었기에 망정이지, 이 이야기들이 한 곳에 모여 장편이 되었다면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이른바 '이놈의
집구석'이 등장할 판이었다. 나는 "축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하고 출판사에게
묻고 싶었다. 차라리 해외판처럼 소통의
부재를 전면에 다뤘던 「질병 통역사」를 표제작으로 하는 게 맞았던 건 아니었냐며 말이다.
생각이 달라진 건 『축복받은 집』을 완전히 덮고 난 이후부터였다. 우리
인생이 늘 그렇듯 이야기는 언제나 흘러간다. 『축복받은 집』의 단편들은 대게 따끔함이 극에 달한 순간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편 속 인물들의 삶도 같이 마침표 찍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인물들의 마침표 이후를 떠올리게 되었다. 축복받은 집을 나선
그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한층 더 자연스럽고 단단해 보였다. 줌파 라히리는 자신의 소설이 '이민자 소설'이라 불리는 것이 타당치 않다고 했다. 나 또한 여기에 동의한다. 그녀의 소설은 오히려 더 큰 범주인 '성장 소설'쪽에 가깝다. 조금
더 정확히는 성장 이후를 독자의 몫으로
남긴 '성장 소설'이다. 마침표
이후 인물들이 성장했을 것이라는 확신은 독자들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줌파 라히리의 이야기는 나도 그랬었고, 우리 엄마도 그랬겠지 하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작은 일상이 때로는 국경과 인종도 초월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축복받은 집』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인물들이 겪은 따끔함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인물들은 더 큰 고난과 마주하기 전에 항체를 만들
기회를 얻었다. 독자인 나는 이야기를 통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웠다. 제때 맞은
예방접종이었다. 알코올 솜만 문지르고 나면 약간의 따끔함 정도는 곧 사그라들 것이다. 이제
다음은 H의 차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녀석에게도 꼭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오늘
밤엔 H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드디어 너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생겼다고, 일시적인 문제들을 돌아보게
할 그런 이야기들이 이 책에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