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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친구랑 싸우면 안 된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일요일에는 성당에
가야 한다. 나쁜 짓 하면 안 된다. 꼭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이를테면 바른 생활 책에도 쓰여있을법한 이야기들.
소년이 위 문장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늘 생각했다.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늘 부모님,
선생님의 표정을 떠올릴 것. 모든 일은 그렇게 하면 간단해지는 문제였다. 소년에게는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성적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누구나 다 소년을 좋아했다. 소년은 말을 잘 안 듣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려울 게
없는데...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건데...
중학교, 고등학교도 초등학교와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말만 잘 들으면 그만이었다. 다만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몸이 커지자 호기심도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어른들의 영역(슬, 담배, 여자)를 멀리 하라 했다. 때가 되면 다 풀어질 것이니 기다리라고 말이다. 이 또한 소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아직까지는 미성년자였으니까. 그렇게 하면 간단해지는 문제였다. 소년이 그러거나 말거나 말 안 듣던
또래 남자아이들은 중, 고등학교에서도 말을 들을 기미가 안 보였다. 그들은 이제 캔맥주를 마시고,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으며, 옆 학교 누구를
따먹었네 마네 하고 자랑하고 다니기 일쑤였다. 소년은 말을 잘 안 듣는 또래 남자 아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심한 놈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에 없던 찝찝함이 조금씩 남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무지'라는 수식어는 생략하기로 했다.
스무 살이 되고 어른이 되었다. 대학교는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업 시간표도 소년의 마음대로, 술, 담배, 여자도 소년의 마음대로였다. 대신
모든 것에는 돈이 필요했다. 소년은 자유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담당 교수라는 사람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 교수는 본인 연구에만 바쁜
사람이었다. 소년이 바른 대학생인지 아닌 지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교수는 소년에게 학과가 업계 평판이 나쁘지 않으니,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취업이나 잘하라 했다. 동아리 선배들이 하는 소리도 똑같았다. 대학이란 곳은 이래도 취업, 저래도 취업이 목표처럼 보였다. 소년은
조금씩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 수업 중에는 '바른 생활'이란 과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군대를 다녀왔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개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가 없었다. 까라면 그냥 까는 곳이었다. 한국 사회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고 말했다. 소년은 그곳에서 진정한 아저씨가 되어 돌아왔다. 학창시절 그렇게 말 안 듣던 또래 친구들도 군대를 다녀오자 모두 모범생이
되었다. 정확히 그 시점부터였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소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말도 더 잘 듣기 시작했다. 있는 집 자식들은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없는 집 자식들도 뒤질세라 소위 말하는 스펙을 열심히 쌓기 시작했다. 꼭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 필요한
일이니까. 이를테면 자기소개서에 끄적거릴 수 있을 법한 일들. 친구들은 늘 생각했다.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늘 취업에 도움이 될 지 여부를
떠올릴 것. 모든 일은 그렇게 하면 간단해지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이 소년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더 재밌게 놀고 싶고, 기왕이면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가끔은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운 좋게 걸린 인턴십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취업에 성공했다. 졸업까지는 1년이 더 남아 있었지만, 더 좋은 직장을 구하려고 발버둥 치지는 않았다. 대신 소년은 남은 1년을
즐기는 데 주력했다.
회사는 또 다른 군대였다. 여기서도 까라면
그냥 까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아니 어쩌면 한국 사회 자체가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힘있는 누군가가 위에서 꾹 하고 누르면, 아래 있는
사람들은 등살이 터져 나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치우라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회사 밖은 지옥이란다. 정말로 밖에서는 비명이
들려오는듯했다. 소년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면 앞서 행동에 옮긴 사람들의 샘플이라거나. 소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생각만 했다. 이
세상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고. 그 어디에도 '바른 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말을 잘 듣고, 안 듣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개인은 세상의 힘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 이 세상의 시스템이었다.
소년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겪어온 세상의 시스템. 그렇게 시스템은 늘 존재해왔다.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세상의
시스템에 대해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 소년의 눈에도 이제 일정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한 주 동안 소년은 세 권의 장강명을
만났다. 제각기 다른 크기의 판형처럼 각 권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소설적 기법도 모두 달랐다. 전형적인 인터넷 SF 습작처럼 보이는
<호모도미난스>, 20대 후반 젊은 여성의 고백투로 이어지는 <한국이 싫어서>, 그리고 도민준이 잠깐 생각날 뻔했던,
하지만 앞선 두 편보다는 소년의 취향에 가장 근접했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만약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읽었다면,
호불호도 굉장히 갈렸을 작품들. 작가는 장강명 한 사람이었지만, 서로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변덕스러운(?)
스타일의 교체를 통해 장강명이 보여주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달리 말해 장강명이 숨겨둔 소설 속 세계의 패턴은 무엇이란 말인가? 소년은 세
권을 차례로 읽고, 다음에는 그 순서를, 각 장의 문단들을 왔다 갔다 섞어 읽어보면서 패턴을 찾기 위해 주말의 밤을 지새웠다. 중학교 시절
내신과목 벼락치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이 어떠한 금전적인 보상을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세 권의 장강명에서
소년이 공통적으로 목격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들'이었다. 시스템이 휘두르는 거대한 힘을 마주하며, 누군가는(리원, 명준) 시스템을
닮은 지배자가 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계나) 다른 시스템으로의 탈출을 모색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남자, 아주머니) 시스템의 패턴을 따라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일상 속 우리들의 모습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인공들은 어느 날 세상에 맞설 무기를 하나씩 장착하게 되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무기는 현실적으로는 '시민권'의 모습으로, SF 적으로는 '우주 알'이나 'X 인자'의 모습으로 독자에게 나타난다. 마치
무협지와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무기를 다루게 되는 그 과정이 하나, 둘 밝혀질 때마다 소년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물론 주인공이 그
무기를 들고 세상에 맞서 싸운다 한들 세상의 시스템에는 티끌만 한 상처 하나 남지도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말이다. (장강명씨는
SF를 자양분으로 삼는 작가인데, 이러한 부분 만큼은 또 지극히 현실적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가 이토록 많은 지지를 받았던
것도 어쩌면 간단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주변에서 봤다면 혀를 끌끌 찼을 그녀에게서, 소년 또한 몇 가지 샘플을 추출하고 있었다. 장강명이
그려낸 캐릭터는 서사와 함께 서서히 흘러간다 해도, 이 세상은 현실 속에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다음 타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년이 될 게 분명해 보인다. 지금까지 소년의 무기는 그저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그다지 소설적인 무기는 아니었다. 만약
장강명의 다음 소설 속으로 소년을 끌고 들어간다면, 소년은 어떤 무기를 들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하게 될까? 만약 당신이 시스템의 패턴,
장강명의 패턴을 능히 알고 있다면 한 번쯤 예측해보는 재미도 있을 수 있겠다. 장르는 기왕이면 <호모도미난스>보다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쪽에 가깝기를 바란다. 아니면 정말로 경쾌하고 선이 굵게 본격 활극으로 펼쳐 본다든지. 털려도 이제는
아주 속 시원하게 말이다. 읽고 있나? 소년의 또래 친구들아! 그리고 되도록이면 읽지 말아 주세요. 소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
여러분들은요. 그냥 그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