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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야간비행 - 정혜윤 여행산문집
정혜윤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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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양서류에게.
혹시나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우선 밝혀두고 시작할게. 사실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몰래 들춰보는 일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나는 사람이 쓰는 모든 편지에는 일정량의 생명력이 있다 생각하거든.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그까짓 거 조금 쳐다 보면 닳느냐고들 이야기하잖아? 그 말 진짜 같지 않아? 정말로 닳는 것 같다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옆자리에 앉던 여자애가 정확히 그렇게 설명했어. 당시 걔는 내 친구하고 러브장이었는지 펜팔이었는지를 하고 있었거든. 아마 그 여자애 딴에는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훔쳐볼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는 취지였을 거야. 별 이야기도 아닌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의 편지에 흥미를 잃게 됐어. 누군가를 위해 고심해서 쓴 문장들을 내가 읽는다 해서 그것을 100% 느낄 수도 없는 일이고, 또 내가 볼 때마다 그 100%가 80%가 되고, 또 80%가 40%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더라고.
이 책 <스페인 야간비행>이 펼치면서도 뜨악했어. 기대했던 본격 스페인 여행기 대신 '미스 양서류에게'라며 너에게 쓴 편지들이 덜컥 튀어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이야기의 시작은 또 필리핀 보홀이라니. 속으로 Hola! Me llamo domingo. Como estas?를 실컷 되뇌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난 2년간 스페인어 공부를 하면서, 특히 초급반만 서너 차례 리부트 하면서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든 몇 안되는 표현이었거든. 사진 한 장 없는 여행기라는 홍보 문구에도 흔들림이 없었는데, 첫 장에서부터 내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어. 역시나 범상치 않은 책이었던 거지. 뻔한 여행기가 지겨워서 집어 든 책이었으니 성공적이었다고 봐야 할까? 머지않아 아름답다 못해 흘러내리는 감성들이 문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어. 건조해진 회사원 감성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순간들도 있었지.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어. 나는 기왕 펼친 책, 어디까지 가나 하는 마음으로 한 챕터씩 읽어나가기 시작했어.
미스 양서류야. 너 혹시 '퀀텀 점프'라는 용어를 알고 있니? 물리학에서 나오는 용어기는 한데, 쉽게 말하자면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까지 순식간에 뛰어오른다는 이야기야. 흔히들 말하는 계단식 성장처럼 껑충하고 말이지. 나는 정혜윤 피디야말로 퀀텀 점프의 달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필리핀 보홈에서 쓰고 있던 여행기는 껑충 뛰는 순간 포르투갈로 가있기도 했고, 또 껑충 뛰는 순간 스페인으로 건너 가있기도 했으니까. 그야말로 시공간이 무색했지.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어. 퀀텀 점프는 2단, 3단 계속되었어. 현재의 여행이 과거의 여행으로 점프하고 나면, 정혜윤 PD는 또 한 차례 힘을 내서, 작가의 작품 속으로 점프를 했어. 그곳에서 사라마구가 나타났고, 조지 오웰이 등장했어. 페소아와 타부키는 서로의 분신이 되었고, 작가의 분신들이 흩어지자 돈키호테가 서있었지. 그리고 다시 또 퀀텀 점프. 최종 목적지는 역시나 정혜윤 피디 자신의 내면이었어. 그리고 그곳에는 미스 양서류, 너의 출생의 비밀도 숨겨져 있었지. 물론 여기서는 그 비밀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게. 편지를 훔쳐본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미안한 마음이니까.
아무튼 나도 <스페인 야간비행>을 읽고 여행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 매 여행이 끝났던 순간들을. 여행지의 나로부터 일상의 나로 돌아왔던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었는지를. 하릴없이 또 인도를 생각하게 됐고, 볼라뇨의 칠레와 쿤데라의 체코를 상상하게 됐어. 정혜윤 피디는 여행과 또 다른 여행 사이의 점프. 그 말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을 문장과 작가들로 이어보고 또 보여주려 했던 것 같아. 물론 그녀의 경험이기에 100% 공감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었어. 그래 맞아. 여행은 신기루로 끝나는 게 아니었어. 다녀오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란 이야기지. 게임의 세이브/로드 포인트처럼 우리는 여행 속에 점프 포인트를 남겨두고 온 거야. 원한다면 언제라도 퀀텀 점프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 미스 양서류야.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싸이월드 시절의 중2 감성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사화산이 되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휴화산이었나 봐. 더 구질 구질 해지기 전에 적당선에서 이 편지는 마무리해야겠다. 다음에 또 정혜윤 피디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면 그때는 내 안부도 좀 같이 전해주렴. 그 초록색 책 재밌게 읽었다고 말이야. 그런데 대체 그러는 나는 누구냐고?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깜빡했네. 기억해줘 미스 양서류야.
내 이름은 미스터 양말류야.
으악ㅎㅎ... 진짜 구질구질하다. 끝.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