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인주도의 인조반정후 북인정권이 무너지며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두차례 예송과 숙종때 여러차례의 환국을 겪으면서 상대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상까지 나타났고, 붕당정치는 합리적인 주장과 민심에 의거하기 보다는 자기 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띠었다. ... 서인는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주로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다가 노론중에서도 소수 특정가문의 중심이 되어 정치를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가문은 권력을 독점하고 지위를 세습하여 장기 집권을 하게 된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는것이었다. 송시열 : 효종~ 숙종때 학자 관료로서 서인중심의 인물이었다.

- 중학교 국정도서편찬위원회의 국사책에서.

 

인조반정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인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였다. 노론과는 달리 6경과 제자백가등에서 사회 모순을 해결할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노론은 이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박해하는 사상적 경직성을 보였다.

사문난적 : 유학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비난하는 표현이다.  숙종때 송시열이 반대파였던 윤휴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비난하였던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중학교 국사책에서는 전혀 윤휴의 이름을 찾을수가 없었고 고등학교 한국사책에서 사문난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의 반대파로서 윤휴를 설명하는 것을 찾을수 있었다.

 

그 시대는 윤휴에게 더 이상 한마디의 말도 허용하지 않았다.

 

가슴이 저미어 왔다. 책을 읽는 도중 한숨을 수십번 쉬기도 하였다. 분개하였다. 교과서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그리고 지금껏 우리에게 각인되어왔던 조선시대는 유교가 뒷받침 되는 나라였고, 병자호란을 막아낸 나라였고, 임진왜란을 막아낸 나라였다. 작은 나라였지만, 침략자를 물리친 자랑스런 나라이다. 어느 통계에 보면 900번의 침공이 있었다고 하는 우리나라 역사는 그 침공속에서도 꿋꿋이 맥을 이어온 자랑스러운 나라였다.  물론 어느시대든지 당파의 싸움은 있었다. 현재는 과거의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작금의 시대만을 보더라도 당파싸움은 얼마나 치졸하고 얼마나 허구가 많던가? 조선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건 자명할것이다. 그러나, 윤휴의 침묵의 제국을 읽으면서 윤휴뿐만 아니고 이렇게 묻혀진 인사들이 얼마나 많았을까를 짐작하게 된다. 잘못된 지식으로 잘못된 교육으로 묻어져버린 학자들 승자의 기록에 의해 씌여진 역사서에 아무 비판 없이 외우기식에 급급했던 내게 이 책은 큰 돌맹이었다. 그래서 윤휴란 인물을 통해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윤휴는 그시대에 서인영수인 송시열과 비길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통하였다. 예송논쟁에서도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서 학문에만 뜻을 두었던 그가 벼슬을 하게 된것은 북벌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삼번이 난이 일었을때가 기회임을 인식했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생각으로 북벌을 계획하였고 숙종이 그의 뜻과 함께할 꿈을 꾸었기에 벼슬에 나가게 된것이다.  물론 서인에게 북벌은 당의 구호였다. 그러나 겉으론 북벌을 주장했디만, 실제로 북벌을 원하지 않았다. 북벌은 그저 왕을 압박하고 백성들에게 군림하고자 하는 서인의 당략이었을뿐이다. 당연히 윤휴의 북벌은 서인의 눈에 가시였을것이고 서인중심의 조선은 윤휴를 곱게 볼일이 없었을것이다. 북벌을 원했던 조선의 왕들은 어찌되었던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 뒤이에 현종이 북벌의 뜻을 비친 후에 죽음, 조선은 이미 사대부의 나라였다.

 

윤휴는 또한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 이단으로 몰리던 시대, 사회의 요구와는 달리 신분제가 되레 강해지던 시대, 남녀차별이 마치 하늘의 원칙인것처럼 호도되던 시대에에 사회흐름이 옛 성현들, 즉 공자와 맹자의 생각과는 다르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유학의 성인들중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공자 맹자는 사람을 계급으로 나누지 않아다. 다만 인격을 기준으로 군자와 소인으로 분류했다. 주희가 신분제를 하늘이 정해준 경계로 분류하고 나서 신분제가 마치 유학의 기본 이론인거처럼 호도되었을뿐이다. 조선의 사대부가 왜 주희의 주자학을 주장했는지는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윤휴의 생각을 살펴보면,

 

윤휴는 북벌대의 실현을 출사의 명분으로 삼았기에 벼슬에 들어서는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첫째로 문제삼은것은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대부들과 유학자들이 북벌은 생각치 않고 저들을 섬기는 것을 달게 여기고 수치도 없이 무릎을 꿇는다고 책자소에 적고 있는데, 이런 패배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현재 삼번의 난에 휩쓸리고 있는 시기에 청을 치면 청을 꺾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윤휴가 주목한 세력은 겉다르고 속다른 사대부 대신 백성이었다.

 

윤휴에겐 스승이 없었다. 독학이었다. 그것은 특정사고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 윤휴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한국 고대사에도 통달해 있었다고 전한다.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이라든가,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삼번이 난이 있는 그 시대가 천시라고 본 윤휴는 북벌을 위해서 백성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리하여 백성을 북벌에 동참시키고자 하면, 법이나 정책이 백성들 중심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윤휴는 지패법과 호포법, 오가작통을 주장하게 되고, 당연히 이것은 양반들에게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수 밖에 없다. 이는입으로는 성현의 말씀을 달고 살지만 행동은 성현의 말씀과 정반대로 사는 특권을 갖은 사대부에겐 통하지 않았다. 결국 지패법만 2년정도 시행되다가 다시 원래 호패법으로 돌아가고 호포법은 좌절된다. 또한 만인과를 실시했다. 신분을 망라하고 능력있는 자를 선발해 북벌에 앞장서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만과를 실시하고는 북벌을 단행하지 않았으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윤휴가 출사한 이유가 북벌에 있었기에, 주희의 경전해석만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상도 변해야 하고, 말로만 북벌을 외치는 사대부의 이중적 처신도 변해야 하고,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다하지 않는 사대부의 계급 이기주의도 변해야하고 능력이 아닌 신분을 따지는 신분제도도 바뀌어야 했다. 그래야만 북벌대의를 이룰수 있었다. 그러나 윤휴의 야심찬 계획은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가 중시되는 시대이기에 매번 저지되었다.  윤휴의 주장은 대부분 채택되지 못했고 윤휴는 사퇴를 결심한다. 그러나 삼번의 난이 끝나고 숙종은 더이상 윤휴의 편에 서지 않게 되고 서인의 편에 서게 되며 경신환국을 격으며 조관이란 단어와, 도체찰사부를 설치할때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내리게 된다. 이때 윤휴는 자신의 처지를 시대의 우환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제 한몸의 영화와 제 집안의 부귀만 힘쓰는것이 조선의 형세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북벌에 나선것이 시대의 우환을 범한것이요, 사대부들의 힘없은 백성들의 등골을 빼서 제 배를 채우는 것이 시대의 형세였는데 양반들에 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는것이 시대의 우환이었으며, 입으로 주자학을 외우는것이 학문의 완성인 시대에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려고 햇던것이 시대의 우환이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

 

윤휴가 역적이 아니란 사실은 숙종이 누구보다도 더 잘았았을것이란것이 작가의 추측이다. 숙종은 서인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을 쫒아낼수 있다고 두려워했을것이고, 삼번의 난이 끝난후 청나라에서 조선의 북벌움직임을 조사할것이란 두려움에 대한 면피용이었을것이다. 윤휴가 죽어야 할 실제 죄는 북벌을 추진한죄, 양반사대부들도 평민처럼 똑같은 의무를 지어야 한다는 개혁을 실시하려했던것이고 이 두가지는 서인정권에게는 금기였기에 윤휴는 사라져야 했을것이다. 이렇듯, 시대는 형세는 진정한 정의를 묻어버릴수도 있는것이다.  

 

주자가 절대적 가치로 군림하던 시대, 그가 죽은후 조선은 침묵과 위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사후 3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숙종실록의 노론사관은 노론이외의 모든 정파를 극도로 비난하고 있기에 비난의 속내를 가려서 해설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쓰고 있고 실제로 작가는 숙종실록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그외에 백호연보, 책강소, 당의통략등의 여러 문헌들을 참고하여 승자의 기록으로 씌여진 역사서를 반박하고 추측하도록하여 바른 식견을 갖도록 하엿다. 서인의 중심인물인 송시열과 그 당파로 인해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던 윤휴는 작가를 만나 북벌과 개혁, 민초의 편에 섰던 인물로 재해석 되어지고 이렇듯 이시대에 와서라도 진실이 알려지게 된 것을 윤휴는 알고 있을지...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뜻 깊은 시간을 가졌었음을 고백한다.

 

푸른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에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바라보니 시름을 이길수 없도다.     -366page 삼막사 망해루에 올라 북벌대의를 이루지 못한것을 시름하며 지은 절구.

 

2011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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