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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ㅣ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인물들, 허무맹랑하지만 일상적인 사건들이 어떠한 논리나 개연성도 없이 쉴새없이 펼쳐진다. 특별한 게 있다면 소설의 배경이 우주라는 것뿐. 몇몇 인물이나 사건이 중복해서 등장할뿐 시리즈 전체에 걸쳐 일관성을 찾기가 힘든 탓에 책을 읽는 중간 자기도 모르게 길을 잃거나 결국 완독을 포기하게 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이유는? 재밌으니까.
더글러스 애덤스가 창조해낸 이 황당무계한 우주는 과학에 기반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진짜 그럴듯한 우주의 모습이 아니라서 더 매력적이다. 그의 우주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과거에 이 지구에서 일어났던 또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고, 외계인들 역시 인간과 너무나 닮아있다. 배경이 우주적 규모로 확장되어도 삶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토록 정신없고 산만하며 무진장 길기까지 한 소설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현실에 대한 조롱과 풍자 혹은 촌철살인의 블랙유머는 치밀한 과학적 근거와 물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 지구의 모습을 묘사하거나, 인간의 이기주의로 인한 무분별한 과학발전과 무자비한 개발이 인류의 존폐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여타의 다른 SF소설과 차별화되는 이 책만의 치명적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보고인의 공격이 있던 때 지구에서 탈출한 한 명의 외계인과 한 명의 인간은 평행우주와 불가능확률추진기 등을 통해 우주 이곳저곳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며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지구의 종말. 주인공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날텐데 뭐하러 그렇게 노력해?˝ 따위의 비관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서 덴트이다. 동시에 그렇게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허접하고 시시하기까지한 더글러스 애덤스의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인물 역시, 홍차와 펍을 좋아하며 샌드위치 만들기의 달인이고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전 우주를 여행하고 엉겁결에 떠맡게 된 딸에게 부성애를 느낄 줄도 아는 영국인 아서 덴트 뿐이다.
결국 아서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광대한 우주 안에서 그는 한없이 미미하고 무력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아서에 대해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애정만큼은 이 시리즈 내내 일관적일 것이다. 우리도 이 지구에서 숨쉬며 살고 있는, 그와 똑같은 ‘사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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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데 이토록 사랑스러운 로봇이라니! 마빈, 내 최애 캐릭터.
p. 108
˝제가 지금 굉장히 우울한 상태라는 걸 아셔야 할 것 같아요.˝ 마빈이 말했다. 낮고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맙소사.˝ 자포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 네가 할일이 있어. 그럼 울적한 생각들도 마음에서 사라질거야.˝ 트릴리언이 밝고 자비로운 어조로 말했다.
˝소용없을걸요. 제 마음은 유별나게 크거든요.˝ 마빈이 청승맞게 말했다.
p. 541
˝너 뭔가 생각이 많구나.˝ 매트리스가 푸루룩하게 말했다.
˝네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마빈이 음침하게 말했다. ˝모든 종류의 정신적 행위에 있어서, 내 능력은 끝없는 우주의 범위 만큼이나 무한해. 물론, 행복의 능력은 제외하고 말이야.˝ 쿵,쿵, 그는 계속 걸었다. ˝내 행복의 능력은 고작 성냥갑에 들어갈 만한 수준이야. 성냥 몇 개를 덜어낼 필요도 없을걸.˝ 그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