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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허무와 방황의 늪에서 허덕이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나가사와) 더 많이 사랑한다는 죄로 옆에서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하쓰미) 누군가는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견디다 못해 도피아닌 도피를 하지만(레이코) 도망도 못간 채 깊은 어둠의 우물 속에 빠져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기즈키와 나오코)
와타나베는 그들 모두의 곁에 있지만 항상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발짝씩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에게 물들지 않고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오코는 그와 너무도 달랐다. 때로는 청춘을 뒤흔드는 좌절이 찾아오더라도, 그 좌절이 친한 친구나 애인의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인생의 한 장이 끝나는 것일 뿐 새로운 장은 언젠가 반드시 시작되는 법이라고,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기에는 나오코는 너무나 나약했고 아직 어렸다.
물론 와타나베도 상처를 말끔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뭐가 됐든 좋아서 연극을 전공으로 택했다는 와타나베는 지도를 ‘진짜‘ 좋아해 지리학을 전공하는 그의 룸메이트 특공대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사람일 것이고, 자기 감정에 더없이 솔직하고 주위에 신선한 생명력을 힘차게 뿜어내는(p.93) 미도리에게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처럼 와타나베는 모든 것에 무심한 태도로 심각해지지 않으려 애쓰며 세상의 주변부를 맴돈다. 상처와 좌절을 겪고도 살아가는 그 나름의 방식인 것이다. 기즈키의 죽음을 겪은 후로 쭉 그래왔고 나오코가 죽은 이후에도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가다가 현재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죽음을 멀리 있는 것, 삶의 저편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p.48) 그래서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책임감을 기즈키에게 고백하며 너와 달리 난 제대로 살아가겠다고, 강해지고 어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p.415) 또한 나오코에게는 기즈키와 공유했던 추억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므로 더이상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며(p.368) 기즈키가 떠난 이후부터 멈춰버린 그녀의 태엽을 다시 감기 위해 애쓴다.
와타나베가 미도리와 같이 있을 때 가장 와타나베답게 혹은 가장 편안해보인다고 느껴졌다면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그는 나오코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느끼면서도 점점 커져가는 미도리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못했고, 아사히카와로 향하는 레이코를 배웅하고 홀로 남겨졌을 때 그의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 역시 미도리뿐이였다. 나오코를 사랑한 건 맞지만 그녀가 갈구하는 건 다른 사람의 팔, 다른 사람의 온기였기에(p.54)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함께 있을수록 마음 속 빈 공간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에 이어 사랑하는 사람까지 잃고도 세상에 홀로 남아 계속 살아갈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달라는 나오코의 부탁은 정말이지 잔인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는 힘주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다.˝(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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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노르웨이의 숲>은 삶과 죽음, 기억과 상실, 사랑과 이별, 젊음과 방황에 대한 소설이다. 이외에도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읽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한 설명이 여기에 보태질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전개되고 나 역시 그의 목소리를 따라서 읽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각기 다른 그들만의 고유한 걸음걸이로 마음껏 활보하게 한다. 마치 아이가 장난감 상자에서 알록달록 다른 옷을 입은 병사들을 꺼내 걷게 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저마다의 ‘노르웨이의 숲‘을 헤매고 다니는 모든 부유하는 청춘들의 생각과 삶을 하나하나 다 들여다 보게 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눈을 돌려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