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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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시니컬한 듯 친절한,

염세적인 듯 다정한

안보윤 작가님의 산문집이다.

"가만히, 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쓴 글들이" 모여있는 책은

작가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렇게 "낯설고 다정한" 누군가의

어제와 오늘을 바라보며

"적당한 거리에서 꾸준히,

적당한 온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나를 사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작가님께서 나와 비슷한 점이

많으실 것 같다는걸.

(감히 추측해 봅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많이 피식거렸고,

많이 피식거린 만큼 공감했고,

공감한 만큼 위로받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가만히, 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쓴 글들이 여기 모여있다.
- P5

지금의 내가 시간을 대하는 방식은 대부분 간과다. 벌써 5월이네, 벌써 마흔 살이 되었네, 벌써 여름이라니 올해가 절반은 지나가버렸네. 나는 보통 그런 식으로 시간을 뭉텅뭉텅 잘라 말한다. 무언가 야단스러운 것이 내 삶을 크게 한 입씩 먹어치우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어쩐지 억울한 얼굴을 한 채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 P23

"저는 힘든가요?" 낯설고 둥근 이를 마주 보고 나는 물었다. "우울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 저는 지금 힘든 건가요?" 망가졌거나 쓸모 없어진 게 아니라 다만 지친 건가요. 힘든 일들을 지나면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걸 전부 묻진 못하고 나는 중얼중얼 ‘저는 힘든 사람인가요‘만 거듭 물었다. 그것은 결코 나를 모르는, 낯설고 다정한 이에게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 P44

괴로워와 외로워는 너무 가까운 말이구나. 모두가 이런 식의, 자신만이 아는 고통과 허무 속에 살고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외로운 곳일까. 서로를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세계 속에 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내게는 충분히 괴로워. 외로워. 거울 속 입이, 또 다른 입이 말했다. 반대편으로 팔을 뻗어 퉁퉁 부은 얼굴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목소리였다. - P57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똑같이 미워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친구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근데 그 사람을 미워하려면 그만큼의 에너지를 써야 돼. 나는 온종일 그 사람을 신경 쓰고 그 사람만 지켜보고 그 사람 말을 곱씹어. 단지 미워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노력을 해. 너 그거 알아? 그렇게 미워하는 동안 자꾸만," 친구가 한참 말을 고르다 발을 멈췄다. 이미 사방이 물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닮아가." - P63

아빠는 나를 조금도 한심해하지 않았다. 넘어질 때 잘 넘어지기만 하면 다 괜찮다며 낙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나의 아빠였으니까. 덕분에 나는 힘차게 내달리지는 못하지만 제법 잘 넘어지는, 그래서 더욱 잘 일어서는 사람이 되었다.
- P68

나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마음을 헤아리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는 눈 밑이 까맣고 우중충하니 맛있는 것을 먹여볼까. 향이 진하고 고소한 커피와 크림브륄레를 곁들이면 즐거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겠지. 무르고 진한 연필심으로 책에 밑줄을 실컷 그으며 좋아하는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늘의 나를 다독여 내일로 보내면, 내일의 나는 적어도 오늘보다 예쁘고 신이 나지 않을까. 나는 강의실에 다다를 때까지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이름 모를 학생들에게 배운 말을 주문처럼 외워보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너무 예뻐서. - P72

언제부터 우리는 과도한 친절을 당연시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친절을 틀에 맞춰 학습한 뒤 무한재생 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 P91

우주적 단위의 외로움이라면 운석이든 사람이든 한 세계를 끝장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오롯이 혼자 떠돌아야 한다면, 그토록 외로운 누군가라면 말이다. 우리 앞으로 운석이 같은 친구를 만나면 꼭 손잡아주자. 꿍 부딪혀도 화내지 말고 같이 놀자. 그럼 종말 같은 건 오지 않을 거야. - P150

나는 앞으로 내가 상실하게 될 것들의 목록을 길게 작성하기 시작했다. 주말이 있는 안정된 삶과 월급과 노후 준비 같은 것들이 내가 제일 먼저 잃게 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라고 나는 썼다. 그럼에도, 가난한 잉여인간이 될지라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무모한 마음이 나를 지금에 이르게 했다. - P157

성급한 다가섬이나 지나친 베풂은 서로의 마음에 얼룩을 남긴다. 너무 먼 거리에서의 방관은 서로의 마음을 건조하게 만든다. 적당한 거리에서 꾸준히, 적당한 온기를 건네는 일. 서로의 마음을 둥글게 문질러 은은한 애정이 차오르게 만드는 일.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로에게 꼭 맞는 누군가가 되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서로의 요철에 맞게 적당히 닳고 낡아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기꺼이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은 또 얼마나.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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