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순서나 전후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 P21
중세사 연구자로서 소양을 쌓은 배러클러프(1908-1984. 영국의 역사가) 교수 자신도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말한다. - P25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d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 - P46
재난을 예언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재난인 법이다. - P10
뒤를 돌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촛불의 거리다. 해마다 300명이 넘는 홈리스와 천 명이 넘는 무연고자들이 외롭게 죽어가는 이 거리에서,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엔 고작 26억을 쓰면서 이들을 추방해 격리하는 수용시설에는 237억의 예산을 쓰는 이 현실에서, 촛불은 어디까지 왔나. - P119
우리는 어떻고, 그들은 어떤가우리는 믿음이 깊어졌다가,믿음을 잃었다가,다시 어려움에 처하면 그것을 되찾기도 하지.우리는 돈벌이에 골몰하다가,도덕적 삶에 관심을 돌렸다가,다시 돈에 대해 생각을 하지.우리는 경이로운 사람들을 만나지만, 바쁜 삶 속에서그들을 잃고 말지.우리는, 그야말로 갈팡질팡.흔들림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개에 대한 말인 것 같아.그건 우리가 그토록 개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 P11
누구에게나 안전한 장소는 하나쯤 필요해. - P16
걱정마. 새 삶을 살아도 과거에 시달리는 게 어떤 건지 나도 안단다. - P31
실제로 우리는 완전한 인간적 잠재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데는 별로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터넷 연결 속도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집중한다. 앞으로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다운그레이드된 인간이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를 오용하여 자신과 세계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 P122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은 디지털 독재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질서는 자유와 더불어 평등의 가치도 중시해왔다. 자유주의는 늘 정치적 평등을 소중히 여겨왔을 뿐 아니라, 경제적 평등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회 안전망 없이 쥐꼬리만한 경제적 평등만 가지고서는 자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자유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유례없는 최고의 불평등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부와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는 것이다. - P122
두 과정이 합쳐지면, 즉 AI의 부상과 생명공학이 결합되면 인류는 소규모의 슈퍼휴먼 계층과 쓸모없는 호모 사피엔스 대중의 하위 계층으로 양분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이 경제적 중요성과 정치적 힘을 잃으면서 국가는 이들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투자할 동기를 적어도 일부는 잃을 수 있다.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럴 경우 대중의 미래는 소수 엘리트의 선의에 좌우될 것이다. 그 선의는 수십 년 동안은 유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태로운 시기가 닥치면 - 가령 기후 재앙 - 잉여 인간들은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이 커질 테고,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p126-127 -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