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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그냥 괜시리 원망부터 하고 싶어진다. 생각하고 생각해보자. 하지만 생각이 나지앉아.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리 길래 뒤를 돌아보았다. 스코비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쳤는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우리 인생의 시작은 추운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쌓여있었고 맨발이었다. 발은 꽁꽁 얼어서 새빨개 진지 오래였고 우리는 서로 껴안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마을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집의 처마 밑에서 스코비아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떨고 있었고 나는 스코비아와 서로 껴안은 채 눈이 내리는 까만 하늘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아침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리슈넬 언니를 만났다. 아니 만났다기 보다는 발견됐다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중간중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한 사람이 우리들 앞에 쪼그러앉아있었다.

“안되겠다.” 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게 리슈넬 언니였다.

스코비아는 잠이 들었는지 움직이지 않아서 리슈넬 언니 등에 업혔다. 나는 리슈넬 언니 신발을 신고 언니를 따라갔다. 그 때문에 그날 밤 리슈넬 언니는 맨발로 집에 돌아가야 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리슈넬 언니 등을 따라 아주 오랫동안 걸은 것 같았다. 그날 밤 일은 거기서 기억이 끝이다. 나는 다음날 아침 생전처음으로 이불이란 물건이 있고 그 이불은 매우 부드럽고 따뜻하며 그 안에서 잠을 깬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것이란 것을 알았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스코비아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햇살 때문인지 집안은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했다. 집은 적당히 넓었고 안을 둘러보다가 거의 동시에 창문 옆 탁자옆 의자에 앉아있던-둘 다 나무였다- 리슈넬 언니와 눈이 마주쳤었다. 언니는 눈웃음으로 나를 마주했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뻣뻣이 굳어있었다. 그게 이상했던지 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괜찮냐고 물어봤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괜찮다고 말한 것 같다. 리슈넬 언닌 집 한쪽의 식기도구가 있는 곳에 가서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주었다. 미지근한 물이었다. 그 미지근한 물이 담긴 미지근한 컵을 손에 받아드는 순간 눈물이 찔끔 나온 것 같다. 찔끔 나온 눈물을 감추기 위해 천장이 보일 정도로 목을 들어 물을 마시다 목에 걸려 기침을 했다. 옷과 이불위로 물이 떨어졌는데 리슈넬 언니는 화도 내지 않고 수건을 가져와 물을 닦아 주었다.

 

스코비아가 일어나자 언니는 스코비아에게도 물을 한컵 따라주었다. 스코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리슈넬 언니를 쳐다보다가 자연스럽게-나에 비해서- 한 컵을 다 마셨다. 언니는 빈 컵을 받아들고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우리와 같은 높이에 앉았다. 나는 그 순간 잠시나마 손에 넣었던 편안한 느낌을 다시 한 번 놓칠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그 때문에 시선을 바닥에 두고 고개를 들지못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리슈넬 언니의 이름을 듣게 됐다.

 “난 리슈넬인데, 너희들 이름은 뭐니?”

“파라스코비아요.”

리슈넬 언니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코비아가 대답했다. 나와 리슈넬 언니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긴히는 스코비아라고 불러요.”라고 말을 이었다.

“그래, 넌 긴히구나.”

날 보며 말하는 리슈넬 언니의 눈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눈을 따라 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난 표현해 낼 수 없었다. 리슈넬 언니의 다음 말은 그 눈에 푹 빠져있던 나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너희들, 여태까지 어떻게 지냈니?”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은 그 전날 눈 내리는 밤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스코비아가 뭐라 말했던 것 같기도하다. 확실한 것은 그 날 이후로 우리 둘은 리슈넬 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리슈넬 언니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좀 멀리 떨어져있었다.-그 날 밤 오래 걸은 것 같은 기억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리슈넬 언니는 먼저 우리들을 깨끗이 목욕시키고 마을에서 입을 옷을 사다주었다. 그 때까지 우리가 입고있던건 옷이 아니라 커다란 푸대자루를 허리부분에서 묶은 것이었다.

우리는 추운 겨울에는 거의 집안에서만 지냈다. 리슈넬 언니가 거의 얼어버리다시피한 발을 치료해줬고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몸을 보살펴주었다. 언니 덕분에 우리는 나름대로 건강해졌고 표정에 웃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집 뒤에는 얼마나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커다란 나무가 한그루 있었고, 집 옆에는 리슈넬 언니가 만들어놓은 작은 텃밭이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우리는 그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나무가 그 수많은 녹색 잎으로 아주 안락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햇살은 그늘이 너무 추워지지 않게 도와줬다. 우리는 텃밭을 가꾸다가 휴식이 필요할 때면 그 그늘 아래 나무뿌리에 모여 앉았다. 처음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리슈넬 언니가 긴 머리를 위로 올려 묶는 걸 보면서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이 그랬다.

“리슈넬 언니, 눈이 정말 예쁘네요.”

리슈넬 언니는 내 말에 방긋 웃어서 대답했다. 언니는 아주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냥 있어도 그 분위기가 아주 좋았고 말의 높이도 차분했다.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말하지 않았고 어떤 일을 해도 리슈넬 언니가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뭘 잘못해도 야단보다는 걱정을 먼저 해주었고 자주 우리를 품안에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스코비아는 리슈넬 언니가 안아줄 때면 그 품안에서 빠져나오려하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에 거부감을 느껴서 자꾸만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 안기다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품안이 기분 좋게 느껴져 나중에는 내가 먼저 안아달라고 떼쓰기 시작했다. 리슈넬 언니는 그 때마다 웃으면서 그 포근한 품안으로 날 껴안아주었다. 그건 추운 겨울날 스코비아와 서로 껴안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포옹이었다.


스코비아는 신기하게 집의 구조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리슈넬 언니가 나에게 뭔가를 가져오라 부탁하면 나는 곧잘 헤매곤 했는데 스코비아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찾아냈다. 하루는 그게 하도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그냥 여기에 있겠다 싶은 곳에 있던데?”라는 대답을 들었다. 내가 말도 안 된다 하자 깔깔 웃으며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하는 스코비아를 나는 ‘얘가 나를 놀리나?’하고도 생각했지만 평소 말없고 얌전한 스코비아가 그렇게 웃는 걸 보는 것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가끔 리슈넬 언니가 마을에 갈 때 우리 둘은 졸래졸래 따라가서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은 멀어서 아직 어린 우리들에겐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언니를 따라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것들을 볼 수 있는 마을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재미난 놀이터였다. 가끔 마을 아이들끼리 놀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끼지 않았다. 그것보단 우리를 보살펴주는 리슈넬 언니를 잃지않는것이 더 중요했다.

어느 날 마을에 갔을 때 였다.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찬거리를 사다보니 스코비아가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나와 리슈넬 언니 둘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스코비아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넓은 길 한쪽에서 돌 벽에 붙어있는 종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슈넬 언니가 부르자 스코비아는 우리들에게 뛰어왔다.

“저게 뭔지 보고 있었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스코비아는 대답부터 했다. 나는 스코비아가 보고 있던 그 종이를 쳐다봤다. 흙색 종이위에는 검은색의 무언가가 빼곡이 그려져있었다.

“여자애는 그런거 보면 안되는 거야.”

리슈넬 언니가 난처한 표정으로 스코비아의 등을 두드리면서 좋게 타일렀다.

 

 

어느 날에 스코비아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씩씩거리며 리슈넬 언니 앞에 섰다. 스코비아가 든 물건은 리슈넬 언니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항상 보던 그것이었다. 스코비아는 그 걸 반으로 쪼개서 리슈넬 언니에게 보이더니 따지듯이 말했다.

“언니도 그 종이에 있는 거하고 똑같은 거 보잖아요. 리슈넬 언니도 여잔데 왜 우리는 안 되고 언니는 되는 거예요?”

나는 리슈넬 언니가 당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당황하기는커녕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리슈넬 언니는 스코비아의 물건을 받아들고 스코비아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스코비아에게 해보였다.

“스코비아. 이게 뭔지 알고 싶어?”

“네.” 스코비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말했다. 스코비아의 대답을 듣자 리슈넬 언니는 눈을 나에게 돌렸다.

“긴히는 어때? 긴히도 알고 싶어?”솔직히 말해 나는 그것에 대해 별로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스코비아가 알고 싶어 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난 스코비아와 리슈넬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예.”라고. 그리고 그걸 글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정오쯤에 리슈넬 언니는 종이들을 탁자위에 펼쳐놓고 우리를 앉혔다. 우리들 반대편에 앉아있는 리슈넬 언니는 오른쪽 검지를 들고 경고부터 했다.

“일단 마을 같은 곳에 갈 때 어제 스코비아처럼 행동하지 말고, 글자에 대해선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해. 한마디로 밖에서는 글자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야해. 알았지?”

나는 “예”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이 뜻하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부분은 스코비아도 많이 틀리지 않았을 거다. 그 날부터 우리들의 하루일과에는 글자 공부가 추가되었다. 리슈넬 언니는 우리를 가르칠 때는 평소보다 더 즐거워보이면서 몸에서 빛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매일 글자를 공부할 때 전혀 지루하거나 하기 싫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상한 건 나보다 먼저 글자에 관심을 보인 스코비아는 공부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몇 달이 지난 후에 스코비아는 조심스레 리슈넬 언니에게 말했다.

“리슈 언니, 책 좀 읽어도 될까요?”

스코비아라 ‘리슈’ 언니라는 애칭을 처음으로 써먹은 때였다. 리슈넬 언니가 그 애칭에 대해 별 말 안하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았기에 나도 그 때부터 리슈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끔씩 슈넬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한날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야. 내 이름이 부르기가 어렵니?”

“아니요. 왜요?” 스코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사귀는 사람들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리슈’나 ‘슈넬’로 부른다니까? 신기하지 않아?”“간단하고 그 이름도 예쁘기 때문에 그런거 아닐까요?”

잠자코 생각하다가 말했더니 리슈넬 언니가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어머,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쁜걸.”


 

스코비아가 책을 읽는 모습은 예전부터 그렇게 해온것 같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책을 탁자위에 펼쳐놓고 한쪽손으로 턱을 괴고 읽기도하고 의자 앞부분을 살짝 든채로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거의 무표정으로 책을 읽었는데 스코비아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슬쩍 보니 모르는 글자가 너무 많아서 이해는 고사하고 읽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스코비아가 돌아와 다시 책을 읽을때 물어봤다.

“너, 그거 뭔 말인지 이해돼?”그러자 스코비아는 날 쳐다보더니 그냥 방긋 웃기만하고 다시 책을 읽어나갔다. 조금 열받아서 스코비아 머리칼을 살짝 잡아당기고, 간지럼도 태우다가 그냥 밖에 나와 텃밭이나 손질했다. 하지만 내가 못 읽는 걸 공부도 잘 안하는 스코비아가 제대로 읽는 ‘척’하는것은 정말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는 리슈 언니가 놀랄 정도로 집요하게 공부했다.

우리는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의 내용이 재미있다기 보다는 책에 있는 글자와 단어를 알아맞히는게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게 됐고 시간이 흐르자 책의 내용에 몰입하며 읽게 되었다. 리슈 언니는 내 실력이 늘어갈 때 마다 잘했다고 칭찬해줬고 나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스코비아가 읽던 그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책은 어느 멋진 왕자님이 수많은 고난을 거쳐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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