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씨가 아침 일찍부터 오더니 책은 찾지않고 베젠트를 찾았다. 뭔가 불쾌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서고로 들어갔다. 베젠트와 스코비아는 항상 하던대로 책 쓰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베젠트 언니. 아수씨 왔는데요.”

베젠트는 책쓰는 것을 중단하고 나를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아침부터 왠일이래?”
“몰라요. 오자마자 언니 먼저 찾는데요?”

베젠트와 함께 서고를 나오면서도 스코비아에게 손을 흔드는 것을 잊지않았다. 스코비아도 손을 흔들어 답변했다. 아수씨는 계산대 옆에 서서 할아버지와 뭔가 얘기를 하고있다가 베젠트가 나오는 걸 보자마자 뭐가 그리좋은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침부터 왠일이야?”

베젠트가 아까 한말을 억양을 살짝 바꿔 말했다. 억양만 조금 바뀌어도 느낌이 달라지니 말이란건 참 신기하네. 아수씨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다시 얼굴을 들고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내리깔았다. 그 동작이 워낙 느려서 보고있으려니 참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나갔다와라.”

흔들의자에 누워있기만하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했다. 베젠트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책하면서 천천히 말해봐.”

베젠트는 말이 끝나게 무섭게 아수씨 손을 잡고 서점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길을 한동안 보고있다보니 스코비아가 어느새 뒤에 와있었다. 스코비아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언니랑 아수씨는 어디있어?”
“산책하러 나갔어.”

“둘이서?”
“둘이서.” 스코비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수씨는 왜 왔대?“
”몰라, 그런거.“

그러자 스코비아는 뚱한 표정을 짓더니 홱 돌아서 다시 서고로 들어갔다.





베젠트가 의외로 빨리 돌아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려고하는 사이에 곧바로 서고로 들어가버렸다. 그 행동이 예상 외였는지 나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도 한동안 서고 쪽을 쳐다봤다.

“왜 저러죠?”

할아버지는 대답없이 “흐음...”하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베젠트가 저런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볼려고 할 때 스코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쪽에서 걸어나왔다.

“베젠트 언니 왜 저래? 얼굴이 새빨게가지고.”
“얼굴이 빨개?”

그러고보니 순식간에 지나가서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

“난 너한테 물어볼려고했는데. 그런데 왜 나왔어?”
“언니가 혼자있고 싶대.”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어쨌든 그 덕에 처음으로 스코비아와 계산대를 지키게되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베젠트는 서고에서 절대 나오지않았는데 방금전에 그런 모습을 봐서 그런지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릴 때부터 느껴온 거지만 스코비아는 항상 조용했고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무엇을 하던 간에 늦는 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대충대충하는 것도 없었다. 가끔씩 실수를 하긴해도 스코비아에게서는 항상 믿을 수 있는 그런 기운이 풍겼다.

“베젠트 언니가 쓰는 책 이제 곧 끝날것같아.”
“어, 그래?”

그러고보니 상당히 시간이 지났다. 베젠트가 책을 쓰기 시작한때부터 그리고 우리가 여기 온지도. 스코비아는 베젠트가 오고부터 쭉 베젠트를 도왔다. 그래서 그런지 베젠트 책 얘기를 하면서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않는 흥분한 모습을 보여줬다. 얘가 이런때가 여태까지 몇 번있었더라?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떠오르지않았다. 흐릿하게 생각나는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너 베젠트 도와주는게 재밌어?”
“응, 재미있어. 책 내용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자극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자극적이라고?”

얘가 책 쓰는걸 도와주더니 말하는게 뭔가 희안해졌네.

“그런데 너 이런 모습 처음 보는거 같다?”
“이런 모습?”
“뭔가 할기차보인달까. 그냥 느낌이 그래.”

스코비아는 손을 내저으며 혀를 찼다.

“설마, 그냥 기억 못 하는 걸테지.”





“스코비아, 나 잠깐 마을에 다시 갔다올게.”

마을로 바로 달려갔다. 아무리 달려도 마을은 나오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 길을 계속 달리니 날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밤이 되고 하늘에 달이 떴다. 하지만 마을은 입구도 보이지않았고 나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달이 밝아서 달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큰 나무 한그루가 들어왔다. 큰나무가 점점 가까워졌다. 달리던 걸 멈추고 큰나무를 천천히 한바퀴 돌아봤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나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애를 먹고있자니 방금전에 없던 한 사람이 나무 밑에 서있는게 보였다. 긴머리를 풀어헤친 그 사람의 뒷모습으로 보건데 여자란 것을 알수있었다. 그 여자는 손에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흔들거리다가 곧 떨어뜨렸다.

“리슈넬 언니?”

맞다. 리슈넬 언니다. 나는 언니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리슈넬 언니 등을 약하게 툭 칠려고 손을 뻗었는데 이상하게 닿지않았다. 다시 한번 거리를 갸늠해서 가까이 다가간 다음에 손을 뻗었다. 어? 또 멀어졌다. 또, 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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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내가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다. 저녁에 밥 먹을 때는 베젠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면서 대충 먹고 재빨리 설거지를 끝내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산책을 핑계로 서점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쳐있었고 길가는 어두웠다. 달이 떠 있지 않았고 주변에 불같은 것도 없어서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보일 때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게 참 예쁘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별에 심취할 수 있었다.

서점 근처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계속 고민했다. 들어가기가 겁났다. 베젠트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코비아가 안에 있었고 나는 갈 곳도 없었다. 책들이 쌓여있는 어두운 곳을 지나 안쪽 구석에 있는 나와 스코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생각대로 스코비아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 외로 베젠트도 있었다.

“왔어?”

스코비아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어...”하면서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을 했다.

“그럼 긴히도 왔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벽에 기대고 있던 베젠트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스코비아도 의자를 돌려 몸을 탁자에서 베젠트로 향했다.

“일단 너희들이 어떻게 글을 알고 있는지는 안 물을게.”

머릿속이 터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죽어버린것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만은 평소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뛰고있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더 주의해야 한다는 거야. 나도 그렇지만. 하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베젠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동료가 생겨서 기쁜데?”
“예?”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돌아다닐 때도 글을 아는 여자들은 본 적이 없거든. 어쩌다가 한두 명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날 밤에 만난 꼬맹이들이 글을 알 줄은 생각도 못했고. 브리크테나에서는 감시가 심해서 더더욱 그렇고말이야.”
“브리크테나?”
“응? 여기 이름이잖아. 몰랐어?”

아, 여기서 산지 상당히 오래 지났는데 나는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베젠트가 지금 말해주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계속 몰랐을지도 모른다.

“스코비아는 아까말한대로 내일부터 나 좀 도와주고, 긴히는 하던 대로 서점 일을 하면돼. 여태까지 해왔던 것보다 조금 더 주의하면서.”
“스코비아는 뭘 도와주는건데요?”
“자료 수집.”

베젠트는 검지를 올렸다.

“자료수집?”
“나, 책쓰고있거든.”
“에?”
“나 돌아오고나서 줄곧 서고에만 있었잖아. 거기 안에서 뭘 하고 있었겠니.”

-아마도-멍해진 얼굴로 스코비아를 쳐다봤다. 스코비아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 그냥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흐음. 스코비아. 아까 한 얘기 또 한 번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

스코비아는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젠트는 만족한 듯 살짝 웃고나서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자들은 많은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어. 그 중 하나가 글을 배울 수 없는 거고. 나는 이곳에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하고 살면서 항상 왜 여자들은 이래야 하나하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막무가내로 할아버지한테 졸라서 글을 배웠고 브리크테나 유일한 서점의 일원이라는 이점을 사용해서 나름대로 보통 여자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오고 있었고. 하지만 한계가 있었어.“
“한계요?”
“응. 대놓고 그러진 못하겠더라고.”

베젠트는 머리를 서너 바퀴 천천히 돌린 다음 말을 이었다.

“난 책을 쓰기로 결심했어. 주제는 ‘여자도 글을 배우게 해줘‘로 정했지. 글을 배웠으면 써먹어야 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책 썼다가 나쁜 일 당하는 거 아니에요?”

리슈넬 언니가 잠시 떠올랐다. 베젠트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럴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저항은 해봐야하는거 아니겠어?”

베젠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고 씁쓸한 웃음이 입에서 나왔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책 한 권 쓴다고해서 곧바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이 서점에서 일한지도 엄청 오래됐거든. 서점에는 부자나 높은 인간들만 오지. 높은 인간들 상대하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안좋은일도 생기고. 그러다가 어쩌다보니 그네들 속을 어느 정도 알게 됐어. 부잣집 여자들도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걸 지지하는 남자들도 있고. 아수 알지?”
“네.”
“아수가 날 도와주는 사람 중 한명이야.”



거리에 붉은 빛이 조금씩 들어설 때 할아버지도 돌아왔다. 뭔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가지고 오실 줄로 상상했는데 양손에 보따리 하나씩만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보따리들을 맡기고 흔들의자에 눕더니 곧바로 잠이 들어버리셨다. 양손에 들린 보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 나는 그걸 들고 곧장 서고로 들어갔다. 서고 구석에서 베젠트와 스코비아가 작은 책상 근처에 있는게 보였다. 베젠트는 의자에 앉아 책상위의 종이에 뭔가를 쓰고있었고 스코비아는 옆에서 책을 한권 펼쳐 보고있었다. 둘다 내가 오는 소리를 듣자 하던 일을 멈추고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손에 들린 보따리들중 오른손 것을 들어보였다.

“언니, 이거 어떻게해요?”

갑자기 베젠트가 손뼉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돌아오셨어?”
“네. 그런데 오자마자 자고있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셔서 피곤한거야.

베젠트가 다가와 보따리를 건네받고 책상위에 올렸다. 두 개의 보따리를 푸니 예상했던대로 책이 들어있었다. 보따리 하나에 열권 정도의 책이 들어있었다. 베젠트는 그것들을 서너가지 종류로 구별했다.

“스코비아. 이거 책장에 넣어줘.”

스코비아가 “네”하며 책을 한움큼 받아들고 쭈욱 나열된 책장들 속으로 들어갔다.

“뭘로 구분한거예요?”
“제목 철자에 따라서.”

그러고 베젠트는 다시 자리에 앉아 글쓰고있던 종이를 한손으로 들어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 종이에 있는게 베젠트가 쓴다는 책일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베젠트는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그러니 나보다 대단해도 그건 당연한거잖아. 스코비아가 돌아와서 다시 책을 여러 권들고 책장들 속으로 들어갈 때 나도 서고를 나왔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누워 자고있었다. 나는 흔들의자 옆 계산대 의자에 앉아 이젠 붉은색으로 진하게 물든 길거리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긴히야.”

할아버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예?”라고 대답하며 돌아봤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자는것처럼 누워있었다.

“물 한컵만 갖다다오.”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에서 물을 한컵 따라갖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상체를 일으켜서 컵을 받아 단숨에 다 마신 다음 다시 의자에 누웠다.

“나 없는 동안 뭔 일은 없었냐?”
“아뇨, 마땅히 없었어요.”

다시 계산대 의자에 앉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하고 시선을 거리에 두었다.

“그래? 다행이군. 귀찮은 일이 생기면 골아프니까.”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저 길거리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기만했다. 사람들 수는 점점 줄어가고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않았다. 보이는 그 장면에 취해가는 것만 같았다.

“긴히야.”

왠지 대답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아무말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음... 아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 그러고보니 베젠트보다 할아버지와 생활한 게 더 오래되었지. 할아버지도 알고있을까? 귀찮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싫다.

얼레, 어느새 밖이 어두워졌다. 문 닫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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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젠트가 왔다고해서 내 일이 바뀐다거나 하는 일을 없었다. 그건 스코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베젠트는 그 날부터 서고에 들어가 식사 때마다 나오고 어두워져야 나왔지만 잠자리에 같이 들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베젠트는 서고에서 생활했다. 스코비아가 책을 가지러 서고를 들락날락 거리니까 베젠트가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봤는데 “안 보이는 곳에 있어서 잘 모르겠는걸.” 라는 숨 막히는 대답만 했다.



가만히 있어도 졸리는 계절이 지나가고 점점 더워지는 어느 날이었다. 잠을 자다가 깨버렸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잘려고 눈을 뜨지 않았지만 머리가 계속 아파 물이라고 한잔 마시려 몸을 일으키니 탁자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 스코비아가 보였다.

“뭐해?”
“어? 깼어?”

스코비아가 날 보면서 가볍게 웃는다. 나는 탁자위에 있는 물건을 살펴봤다. 불이 켜진 촛불과 종이였다. 스코비아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연필이었다. 스코비아가 뭘 하고 있는지 금방 깨달았다.

“글 쓰고 있었어?”
“안 쓰면 잊어버릴까봐...”

일어나서 탁자 옆으로 걸어가 스코비아가 쓴 글을 보았다. 오늘 일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간략하게 또는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써서 적혀있었다.

“오늘 일들 쓰는 거야?”
“응. 생각날 때마다 간간히 썼어.”
“종이는 어디서 구했어?”
“서고 구석에 거미줄 쳐진 게 있더라. 오랫동안 안 쓴거 같아서 조금씩 잘라냈어.”

그래도 종이도 비쌀 텐데 그렇게 보관했단 말인가? 뭐, 그 큰 서고 안 보이는 곳에 그런 종이뭉치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무서워서 서고 구석구석 살펴보지는 않았구나.

물을 먹어야겠다는 처음 생각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나는 스코비아가 글 쓰는 것을 지켜봤다. 종이와 손과 스코비아의 얼굴이 촛불에 의해서 붉게 물들었다. 스코비아는 천천히 그렇다고 느리지 않게 글을 써나갔다. 스코비아는 내가 보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글을 한줄쓸때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상당히 고심해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날 이후로 글을 써 본적이 없었다. 서점에서 일하느니만큼 글을 읽기는 수도 없이 읽었지만 써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사실을 자각했을 뿐이다.

스코비아가 글을 다 써서 연필을 놓았다. 쭉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던 말을 해야 될 때라고 느꼈다. 스코비아에게서 등을 돌리고 허공에 대고 묻듯이 스코비아에게 물었다.

“리슈넬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스코비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분명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런 것을 묻는 내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거고.

“무사할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가슴 한켠이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말 무사할까? 무사했으면 좋겠다. 아무 일 없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한동안 아무 대화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스코비아에게 등을 돌린 채로 말이다. 그러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하고 또 천천히 이불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불 밖에서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스코비아도 탁자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말을 좀 더 해보려고 잔뜩 생각하다가 포기하려 할 때 스코비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살짝 내려 뭘하는지 보니 스코비아는 또 다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뺨에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밤 이후로 리슈넬 언니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코비아는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리슈넬 언니 얘기를 해봤자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괜히 우리끼리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더니 계산대에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가 되었다. 그날 밤 이후에도 나와 스코비아는 그 전과 다름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하지만 다시는 리슈넬 언니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요 근래 할아버지가 책을 구하러 서점을 비웠기 때문에 나 혼자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글을 못 읽는 나는 책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손님들이 오면 계산대 위의 종이에 책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글을 아는 손님들은-글을 못 읽는 남자들도 있었다.- 기꺼이 책 이름을 적어줬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스코비아가 확인해서 책을 내다줬다. 할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책을 가져올 때 늦게 가져올 필요를 못 느꼈는지 책을 일찍 내왔다. 얼굴을 아는 손님들이 “오늘은 일찍 받는군요.”같은 말을 하면 찾기 쉬웠다고 둘러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 찾아왔다. 전날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기어코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점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가 땅에 부딫힌다음 서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입구 근처의 책들을 안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책더미 몇 개를 움직이고 나니 베젠트가 안쪽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베젠트는 서점 밖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야, 오늘 날씨가 정말 좋은데?”
“비오는 거 안 보여요?”

입을 삐죽 내밀며 핀잔을 주니 무안하니 헤헤 웃는 베젠트. 그러고 보니 베젠트가 계산대에 나온 건 처음 봤다. 그 날 밤 전에는 아마도 베젠트가 계산대에 있었을 듯한데. 아, 돌아오고 난 다음에 이 시간에 서고에서 나온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오늘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책더미를 하나 안쪽으로 옮기니 베젠트도 도와주기 시작했다. 입구 쪽에 있던 책들이 적었을 뿐더러 두 사람이 옮겼기 때문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뭘, 내 일이기도 한데.”

베젠트는 비가 오는걸 잠시 보다가 다시 서고로 들어가려는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몇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 말했다.

“거기 책 좀 하나 건네줄 수 있어?”
“뭔데요?”
“기적의 아침이란 건데.”

책더미에 올렸던 손을 보니 손가락 사이로 기적의 아침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책 위에 있던 손을 살짝 움직여 책을 잡고 들어올렸다.

‘어?’

어느새 다가온 베젠트가 내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고마워.”

베젠트가 말끝을 살짝 높이면서 장난 섞인 대답을 했다. 베젠트는 웃으면서 책을 한번 흝어보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실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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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가 왜 검은색일까?
암튼 특이한 서사구조를 가진 소설이네요.
잘 보고 가네요. ~~

이윤후 2009-08-03 12:51   좋아요 0 | URL
잘 봐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D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계산대를 보고 스코비아는 서고에서 책을 가져왔다. 얼마 뒤에 스코비아는 처음에는 저지당했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 책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과 책을 구해오는것을 빼면-할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외출해서 책들을 구해왔다.- 서점 일들을 거의 우리 둘이서 하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들도 나나 스코비아가 만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면서 좋아했다. 어느 날은 리슈넬 언니를 잠들기 전까지 완벽하게 잊을 수 있는 날이 있기도 했다. 그런 날을 맞을 때면 자기 전에 마음 한 쪽에서 죄책감이 점점 커져 나를 집어삼켰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리슈넬 언니 생각에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적이 많아졌다. 그런 와중에도 이 생활에 익숙해져가는 내 자신이 밉다.




우리가 서점에서 일하며 생활하기 시작한지도 어느 사이엔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 날도 할아버지는 흔들의자에 누워-앉는다기 보다는 눕는 다는 표현이 역시 정확해보인다.- 천천히 의자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해는 벌써 하늘 중앙에 턱하니 걸려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아 서점 밖 거리는 빛으로 가득해 모든 사물이 제대로된 색깔을 뿜어냈다. 평소의 길거리는 먼지가 가득낀 것 같이 보이게하는 그런 색깔들이었다.

오전에 어느 부잣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한명와서 예약된 책을 사간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 할아버지는 계속 졸고 있었고 스코비아는 서점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서점 밖을 보고있다.

사람들이 푸근한 날씨 속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의 한 여자의 얼굴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선가 본 사람같았다. 이 마을에 살고있는 여자 중에 이 거리를 많이 지나다니는 여자라 생각했다. 여자는 움직이기 편한 갈색 상의와 바지를 입고있었는데 밝은 빛 때문에 땅의 일부같이 보였다. 그녀는 우리 서점으로 곧장 다가오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우리 가출소녀. 일은 잘하고 있었어?”

베젠트였다.




누워만있던 할아버지가 일어나 베젠트 언니를 맞이하고 나와 스코비아는 인사를 했다. 베젠트는 그 전에 봤을 때보다 활기가 넘쳐보였다. 베젠트가 몸에 가지고있는 것은 약간의 돈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어디에서 밥을 얻어먹기에는 글러먹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디서 고생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전혀 풍기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그래. 뭔 짓거리를 하면서 돌아다녔냐.”

할아버지가 베젠트를 보는 모습이 장성한 딸을 흐믓한 마음으로 보는 아버지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 그러고보니 할아버지와 베젠트가 어떤 관계인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 난 지금까지 베젠트와 할아버지를 서로 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두 사람은 가족이란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마음을 바로 잡고 왔죠. 그 때와는 다르게 이젠 활기가 넘쳐 흐른달까요.”

베젠트는 가까이 있던 책을 한 권들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좌르르 넘겨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결심을 굳혔죠.”

베젠트는 단호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하는 [그 때]가 언제를 의미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처음만났던 그날 밤 그 때일까하고 어림짐작해봤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생각인걸 확인하고 고개를 저어 날려버렸다.

“그러냐.”

할아버지는 걸음을 옮겨 계산대 옆의 흔들의자로 다가가 의자에 누울려다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대 위를 손으로 한번 쓸어 본 다음에 의자에 누웠다.

“그럼 네가 다시 계산대를 지키는 일은 없겠구나.”

베젠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서 시장 좀 봐와라. 베젠트가 왔으니 마음 껏 사와봐.“

할아버지가 스코비아에게 은색 동전을 주면서 말했다. 나는 그것이 전에 아수씨가 줬던 동전임을 기억해냈다. 아수씨는 그 뒤로도 몇 번 서점에 왔지만 은색 동전은 쓰지는 않았었다. 어느 날 금고에서 은색동전이 없어졌길래 할아버지가 책 구하는데 썼을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우리들이 막 나서려는 참이었다.

“너희들 어디가니?”

베젠트가 입고있던 갈색옷을 단출한 상의와 치마로 갈아입고 나오고있었다. 오늘 처음봤을 때 베젠트가 너무 밝은 빛 속에 있어서 그랬을까? 갈색 옷을 입고있던 베젠트와 지금의 베젠트는 너무 차이가 났다. 너무 초라했다. 이게 베젠트의 진짜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아까전에 본 것과 너무 대조되서 이렇게 보이는 걸거다.

“시장 좀 보려 나갈려고요.”
“그래? 나도 같이 가자.”

본인을 축하해주기 위해 시장을 보려가는 것인데 당사자가 같이 가겠다고하니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는 그냥 흔들의자에 누워 그 삐그덕 거리는 의자를 흔들고 있었다. 그 사이 베젠트와 스코비아가 어느새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전 내가 보았던 밝은 빛은 그 위력이 한층 약해지고 붉으스름한 빛이 두 사람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시장 쪽에는 우리말고도 찬거리를 사려는 아녀자들로 가득차있었다.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뭘 사는지 보는것이 어릴 때 리슈넬 언니와 같이 다니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 씁쓸하다.

“어머, 할아버지가 왠 일로 이런 큰 돈을 쓰라고했지?”

베젠트가 스코비아에게서 넘겨받았는지 은색동전을 들고 감탄했다. 그 반응을 봐서 베젠트도 할아버지가 그런 큰 돈을 쓴적을 본 것은 몇 번 없는 것 같았다. 가족이 집을 오랫동안 나갔다가 돌아와서 큰 맘먹고 쓰라고 허락해준 것일까?
우 리는 베젠트의 기호에 따라 음식들을 사려고했지만 베젠트가 우리를 신경써준 덕분에 스코비아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사게됐다. 마지막으로 국을 끓일 돼지고기를 사고 돌아가는 길에는 거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야흐로 완벽한 오후였다.
붉은 거리는 낮에 보았던 밝은 거리와 다르게 뭔가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고있었다. 같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인데 왜 이렇게 서로 다른걸까. 낮에 보았던 빛은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는 빛이고 지금 빛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드는 빛인가? 그럼 진짜는 언제 볼 수 있는거지? 진짜는 빛이 없어야 볼 수 있는건가? 아니 빛이 없으면 일단 볼 수가 없잖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아도 뭔가 중요한게 하나 빠진것같은것 같아 나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스코비아는 남은 동전을 셈하고 베젠트는 야채나 고기들을 담은 헝겊 주머니 안을 보면서 싱긋 웃는게 저녁에 만들어질 음식을 미리 예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좀 더 오후의 붉은 빛에 도취되며 걸었다.

“어? 베젠트!”

쾌할한 남자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날아왔다. 곧바로 목소리가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수씨였다. 아수씨는 곧장 우리에게 달려왔다.

“안녕, 얘들아?”

아수씨와 스코비아가 서로 알게된건 얼마되지 않았지만-스코비아가 청소를 시작하고도 한참 뒤에야 아수씨가 왔었다.- 그런대로 얼굴은 익혔었다. 어쨌든 아수씨의 관심은 우리가 아니라 베젠트 였다.

“언제 돌아왔어?”
“오늘 왔어.”

베젠트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생겼지만 말에는 오랜만에 만나 감격에 겹다거나 하는 그런 감상적인 느낌은 전혀없었다. 어제 오늘 만난 친구를 길에서 또 한번 만나서 건네는 인사말 같았다. 하지만 아수씨는 그게 아니었다. 아수씨는 베젠트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귀까지 빨개있었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하는 모습이 흡사 어린애 같았다.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었어.”

그 말에 아수씨가 날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려봤다. 그 때 아수씨가 놀랐었나? 아니, 혹은 그 전에 베젠트가 없어진 걸 알지않았을까? 아니다. 생각해보니 아수씨는 날 처음 봤을 때 베젠트가 어디갔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 동안 뭘했어?”
“결심을 굳혔어.”
“그래?”

아수씨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피더니 베젠트의 귀를 손으로 가리고 짧게 귓속말을 했다. 베젠트는 킥하고 웃었다.

“그래.”

아수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않은채 다시 다물었다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그 어떤 말도 입밖으로 내지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자 베젠트가 싱긋웃었다.

“각오도 했어. 이젠 돌아갈 길도 없고.”

둘이 하는 말이 대체 뭘 말하는 걸까하고 대화에서 유추해내려 했지만 내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뭐 별로 속상하지는 않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

아수씨가 이 말을 하고 베젠트와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음 저 쪽 사람들 속으로 섞여 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스코비아가 베젠트에게 무슨 각오를 했냐고 물으니 “대단한 각오.”라고 말해주었다. 베젠트 나름대로 멋진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이해가 되지않으니까 그저 황당할 뿐이다.
그 날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배터지도록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먹고나서 씻지도 않고 바로 자버렸다. 아마도 뒤처리를 스코비아가 했을것 같았는데 그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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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부터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서점 입구에서 잘 보이는 계산대에 서게됐다. 할아버지는 처음 만난 날 보았던 흔들의자를 계산대 옆으로 가져와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고 나는 계산대 뒤에 자그마한 의자를 놓고 앉았다. 원래 그런건지 아침이라 그런지 몰라도 밖에 돌아다디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손님이 이렇게 안오네요. 앞에서 소리라도 지르는 게 좋지않을까요?”

할아버지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가 뭐 잘못한 것마냥 날 쏘아봤다. 내가 한 말에 기분이 상했나? 할아버지는 그런 기운을 보이긴했지만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서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돈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손님이 적은 건 당연한거야.”

그 말에 리슈넬 언니가 가지고있던 수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항상 봐도봐도 어디에있었는지 모를 또다른 책들을 리슈넬 언니는 가지고있었다.

“그럼 보통 사람들은 서점을 안 오나요?”
“오기야 오지. 가끔씩 온다. 가끔씩.”

‘흐 음’하며 콧소리를 내고 가게 밖을 주시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서점의 계산대에 있는 날보고 희귀한 것을 본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되도록 그런 것들을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손님을 대비하고 있었다. 리슈넬 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무료하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할아버지는 오전이나 오후나 불규칙하게 책을 가져오라고 시켰었다. 그런데 오늘은 스코비아에게 어떤 책도 가져오라는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가 내 말에 반응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책 가져오라고 안하세요?”

“오늘은 왠지 책을 읽고 싶지가 않구나.”

나는 생각했다. 방금 할아버지가 내뱉은 저 말의 의미를.

“내가 읽었다.”

망연자실한채 껄껄대고 웃는 할아버지를 보고있으려니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다. 서점 안쪽 안 보이는 곳에 있을 스코비아가 생각났다.

“뭐 손님이 왔을 때 적시에 책을 가져와야하기 때문에 훈련 좀 시킨 것 뿐인데 뭘 그러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저 글 읽을 줄 알아요’라고 몇 번이나 말해봤지만 그 말은 결국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말하지않기로 이미 다짐했을뿐더러 그 순간 손님이 왔기 때문이다.

“며칠동안 베젠트가 안 보이더니 사람이 바뀌었네요?”이 남자는 키가 훤칠히 컸고 머리는 단정했다. 얼굴은 조금 통통했으며 기분좋은 미소에 호감이 갔고 입고있는 옷은 보통 사람들이 입는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일단 저렇게 빛이 반사되는 실이나 옷감을 쓴 옷은 쉽게 볼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있었다.

“안녕?”
“아, 아, 안녕하세요.”

어라, 왜 말을 더듬지?

“아수.”

할아버지가 묻자 아수라 불린 남자는 시선을 돌렸다.

“부탁한 책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어어? 말한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예요?”
“근처를 둘러보고와. 그 사이 준비할테니까.”
“기다리면 안되나요?”
"아수.”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낮게깔고 자뭇 근엄하게 말하자 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점 밖으로 나갔다. 조그맣게 “못 이긴다니까.”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사라지자 할아버지는 내내 앉아있던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스코비아가 있을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조그맣게 할아버지와 스코비아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서점 밖 거리에 시선을 두고있자니 지나가던 사람들과 잠깐잠깐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들 중에서 방금 전 만난 아수같은 옷을 입고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이 수수하고 조금은 더럽혀진 옷을 입고있었다. 그러고보니 서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보이는 여자들은 아버지와 같이 걸어가는 어린 애들 뿐이었다. 여자들은 아예 이 쪽으로 오지않는 것일까?

“할아버진 아직 책 찾는 중이시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수가 가게 입구에 서있었다. 시간이 벌써 상당히 지난걸까?

“네... 들어가셔서 안 나오시네요.”
“흐음. 이상하네. 평소라면 금방 가져오실텐데.”

그 말에 괜시리 우리가 이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 마음 한쪽이 불편해졌다. 분명 스코비아는 그 책을 이미 찾았을 테지만 평소에 그랬듯이 시간을 끌고있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책을 가져왔을 때보다는 시간끄는것을 단축시켰을테지만...

“여깄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한권의 책이 아수에게 날아와 가슴에 부딫혔다. 아수는 가슴을 맞아서 아플텐데도 팔을 들어 책을 움켜잡았다. 그는 잠시 동안 콜록대고 난 뒤에 책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귀한 물건을 이렇게 다뤄도 되는겁니까?”
“된다.”

아수는 화를 낼것같으면서도 단념하는듯한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살폈고 할아버지는 흔들의자에 도로 앉아 의자를 흔들었다. 그러고보니 아수도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그나저나 베젠트는 어디갔어요?”

아수가 책을 여러장 한꺼번에 좌르륵 넘기면서 물었다.

“놀러갔다.”
“놀러가요? 어디로?”
“몰라 그건.”

음, 저 짧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무뚝뚝한 말투. 듣고만있는 내가 오히려 짜증이 나려고한다. 그런데 아수는 익숙한건지 체념한건지 아니면 둔한건지 몰라도 아무런 기분 변화도 없는 것 같았다. 책을 대충 다 흩어본 아수는 나에게 은색 동전을 하나 건네줬다. 그러자 대뜸 할아버지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수야. 책값에 비해 너무 비싼데.”
“성의입니다. 성의. 이 책 구하시느라 고생하신거 다 알아요.”

할아버지는 혀를 쳤지만 아수는 신경쓰지않고 사람들이 통행하는 거리로 몸을 옮겨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계산대 밑에 있는 금고를 열어 동전을 넣다가 금고에있는 다른 동전들은 모두 갈색아니면 누런색이란걸 깨달았다. 은색 동전은 방금 받은 동전 하나 뿐이었다.

"할아버지. 방금 받은 은색동전이 그렇게 비싼건가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동전의 가치를 설명하기위해 가장 적합한 말을 찾고있는 것 같았다.

“그 동전 하나면...”
“네?”
“우리가 한 달동안 일 안하고 먹고 살 수 있지.”





“스코비아. 그 돈들어있던 주머니 어디있는지 볼 수 있어?”
“응. 왜?”

서점에서 일하며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은빛동물이 줬던 돈주머니를 스코비아에게 맡겼었다. 나보다는 항상 차분하고 거의 모든일에 섬세한 스코비아가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볼게 있어서.”

스코비아는 뭐 볼게있냐는 듯한 눈초리로 날 봤지만 별 말않고 주머니를 꺼내주었다. 스코비아는 일단 방 구석에 있는 옷장을 잠시 끌어내고 바닥에 깔려있던 나무를 들어냈다. 그리고 손을 그곳에 집어넣고 잠시동안 찾더니 이내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같이 생활하면서 나 모르게 언제 저런걸 만들었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조심스레 주머니를 손에 올리고 입구를 열어 보았다. 안에 수북히 쌓여있는 것은 노란 동전들이었다. 촛불을 끄고 하나를 꺼내 달빛에 비춰보니 계산대 밑에 있는 누런 동전들보다 좀 더 밝고 뚜렷한 색을 보이고있었는데 그건 이 동전들이 새 것이라 그런 것 같았다.

역시, 비싼 돈을 그냥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아수씨가 왔을 때는 할아버지가 직접 책을 가져왔지만-뭐, 스코비아에게 전하기만 했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스코비아에게 가서 책을 받아왔다. 할아버지가 종이에서 책을 찍어주고 내가 그 위치를 기억해서-하는척해서- 스코비아에게 알려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일도 하루에 다섯 번을 할까말까했다. 여전히 손님은 적었다. 가끔씩 오는 손님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하고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책을 찾는 경우는 드물었고, 여태까지는 모두 미리 예약한 책을 사러 온 것이었다. 당연히 전부 남자였고 나이먹은 아저씨들보다 아수씨 처럼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남자들은 모두 날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처음보는 동물을 보는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비록 동전을 직접 건네주지않고 위에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줘서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되도록 친절하게-그들 눈에 어떻게 비췄을지 몰라도- 대했다.

그리고 이전까진 잘 몰랐지만 책은 보통 음식 재료 같은 것보다 값이 훨씬 비쌌다.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수의 동전을 나에게 줬고 그 동전들은 리슈넬 언니가 야채등을 사면서 썼던 동전과 비교하면 거의 수십배에 가까웠다. 그렇다보니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도 보통 사람이 생활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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