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퍼온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제3의 시선들

 

 

 

 

 

 

표지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선형의 계단, 숨죽인 고요, 흰색 담벼락의 공포, 창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 길게 내쉬는 한숨. 무릎으로 머리를 깍지 끼고 앞뒤로 흔들다 보니 2000년 겨울의 덕수궁이 떠올랐다. 그때 덕수궁은 오르세 미술관 인상파 화가 전시회로 분주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싶었던 나는 하얀 입김을 뿌리며 언 발을 종종거리며 덕수궁으로 향했다. 미술관임에도 매표구부터 길게 늘어선 행렬이 전시관 안까지 이어졌다. 타인의 몸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밭은 공간을 이동하며 별이 빛나는 밤을 찾았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느슨하게 계단을 밟았다.

2층은 1층과 비교해 무척이나 한산했지만 공간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그곳을 꽉 메우고 있던 기괴함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고야의 작품 백 여점이 주제별로 전시되고 있었는데 <타인의 고통> 표지 그림도 그 중 하나였다.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시리즈는 인간의 잔악성을 극대화시키고 짐승처럼 도살된 무참한 죽음과 그것을 즐기는 도착적인 광기를 부상시킴으로써 혐오와 구토를 자아냈다. 발을 떼기가 겁이 날 정도로 공격적이고 포악했다. 나는 서둘러 문을 빠져나오며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하늘이 유난히 맑고 유연한 날이었다. 고야의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겨울의 냉기 사이로 빠르게 흩어졌다. 이렇듯 타인의 고통은 한시적인 충격은 유발할 지언정 영원을 구가하지는 않는다.

수잔 손택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스펙터클한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타인이 겪는 고통과 불행(손택은 주로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은 연민과 분개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내재화하여 고통에 참가시키지는 못한다. 폐허의 먼지 속에서 살점이 너덜거리는 손가락 하나가 기어 나와도, 포탄과 함께 하늘을 나는 남자의 가슴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여도, 사지가 절단되어 몸통만으로 걷는 아이가 배시시 웃고 있어도, 우리는 욕을 퍼부어대며 채널을 돌리거나 인상을 찡그리며 가족과의 오붓한 저녁 식사에 열중한다. 마찬가지로 기아체험은 하나의 이벤트이자 개인의 성과물일 뿐,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지는 아니다.

사진은 실제보다 사물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야 하므로 보다 더 충격적인 이미지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최초의 자극은 점차 엷어지고 충격에도 익숙해진다. 더불어 충격적인 이미지가 주는 이런 고통은 이곳이 아닌,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는 믿음과 함께 안도감마저 심어준다. 나아가 이러한 안도감은 개인의 은밀한 관음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여 희열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수반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분명 사진은, 작가의 상상력이나 주관이 확고하게 개입되는 그림에 비해 객관적이고 실체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러나 사진도 조작은 가능하다. 그것이 카메라로 잡기 이전의 연출이든, 인화나 전시 과정에서의 조작이든 간에 작가 자신이나 영향력 있는 힘의 필요에 따라 조작되고 교묘히 이용되기도 한다. 손택은 미국에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미국인들이라면 히로시마와 베트남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을 보려는 행위를 병적인 것이라 간주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미국인들은 ‘국민을 격분시켜 당국에 맞서게 만들 위험이 조금도 없는’,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이 어떠한 매체이든 힘의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손택 특유의 통찰력과 깊고 편안한 문체, 당당한 지성이 아름답다. 게다가 문학과 사진, 전쟁의 영역과 역사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지력은 놀랍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보다는 온몸으로 끌어안으려 한 그녀의 용기와 실천은,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로부터 귀감을 사 마땅하다.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르며 L이 말했다. 교수가 타인의 고통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쓰느냐면서 이 책을 추천했노라고. 난 사실 조금 웃겼다. 그 교수가 했다는 말은 마치, 이 책을 통독하기만 하면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고 체화시키는 현목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으스대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교수가 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쳐도 그것은 지식인들의 비굴한 자기만족이거나 우월감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의 텍스트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인가. 짧은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저자의 통찰력을 눈 여겨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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