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속 모작과 위작 이야기
이연식 지음 / J&jj(디지털북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숨에 읽어내려갈 만큼 흥미있었다.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야기들도 있으나 좀 더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소개하여 그 뒷 이야기까지도 알 수 있었다. 끊임없는 위작의 생산에는 인간의 연약하고 뻔뻔한 기질, 돈과 명예를 놓칠 수 없어 거짓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성향의 조화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걸작과 그를 둘러싼 위작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나 읽고 난 뒤 인간에 대한 염증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린 듯한 속쓰림과 메스꺼움도 남는다.
마지막으로 신선한 소재로 재미있는 책을 선사한 작가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값의 비밀, 양정무*******************

33세에 (1639.1.5) 13,000 길더 (13억원 상당)의 대형 주택을 구매했다. 당시 평균 주택 가격이 1,200 길더였다. 당시 한 점당 500길더의 가격에 주문을 받았고 주문이 밀려 있었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젊은 작가들이 연간 100길더의 수강료를 내고 그의 문하에 계속 모여들었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그의 연간 소득은 3,000 길더 정도로 추정되고 오늘날 40억대의 자산가였으나 주택 잔금을 계속 미루다

1656년에 결국 개일 파산을 신청하고 1656년에 집을 11,000길더에 판매하였다.

그가 벌어들인 막대한 돈은 어떻게 된 걸까?

법원은 그가 파산 신청을 하자 그의 재산을 압류해 경매에 넘겼다. 동시대 작가 작품 60점을 포함해 악기, 무기, 골동품, 서적, 수입산 고급가구, 아시아산 의류 등이 경매에 넘겨졌는데 이를 통해 그의 사치에 대한 소유욕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파국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2년간 수많은 감동적이고 깊이 있는 명작을 탄생시켰다. 자신을 파멸시켜 쫓겨났던 그의 집이 오늘은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렘브란트 34세 자화상, 1640

렘브란트 63세 자화상,16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값의 비밀, 양정무***************

 

 

14mx41m: 천지창조 - 노아의 방주,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예언자들

시야로 부터 20m 이상 높이의 (7층 정도의 높이) 천정.

Terribilita: 공포를 줄 정도의 극한의 아름다움.

 

미켈란젤로의 초상화 by 다니엘레 다 볼테라 1550-1555

: 그는 재능만큼 잘난척도 심하고 다혈질로 선배 화가에게 맞아 콧등이 주저앉았다고 한다. 교황 앞에서 거들먹거리다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몰락한 귀족 집안으로 당시 미술 작가들 출신 배경을 기준으로 본다면 꽤 높은 편이어서 이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5형제 중에서 유일한 소득원은 미켈란젤로 뿐이어서 평생 형제들로부터 금전적으로 시달렸다. 때문에 돈 문제로 고객들과 수시로 다퉜고 예술에 대한 것 만큼 금전 문제에서도 열정적이어서 돈 계산을 할 때 철두철미했다. 시스티나 천장벽화를 포함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짐을 싸서 고행 피렌체로 돌아갔다. 결국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황급히 돈을 마련해 그의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9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9

 

24살에 제작. 이 조각상으로 일약 유럽의 스타작가로 발돋움한다. 유일하게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데 사람들이 무명의 젊은 조각가가 이렇게 완벽한 작품을 만들엇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자체가 서명이므로 굳이 별도의 서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스스로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값의 비밀, 양정무

 

 

레오나르도 다 빈치, 원근법 준비 드로잉; 1473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업노트 코덱스 레스터: 1506-1010

*빌 게이츠가 1994년 구매.

*자기의 아이디어를 쉽게 베끼지 못하게 하려고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준비 드로잉: 1494-1495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8

 

 

"나를 만든 것도 메디치 가문이고 나를 파멸시킨 것도 메디치 가문이다.'

- 20세에 메디치 가문에 들어가서 여러 문인들을 만나고 고대 조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북부 이탈리아의 실력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멋진 예술가를 보내 환심을 얻으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밀라노 궁정으로 파견시켰다.

-결국1482년, 30세 대 자기소개서를 들고 밀라노로 가서 1499년까지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예술적 대접은 초라하여 초반에는 거의 활동하지 못했고 후반에서야 몇몇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 받음. 그의 왕성한 창작력을 고려할 때 밀라노에서 남긴 업적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밀라노의 실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그를 주로 파티 플래너나 무대 디자이너로 고용하여 결혼식이나 만찬장의 실내 디자일을 하도록 했다.

말년에 프랑스 왕의 스카우트 요청을 받아 프랑스 서쪽 앙부아즈로 이주해 서너해를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유품으로 노트북 몇 권과 모나리자와 같은 그림 몇 점 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