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삶,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이 외침은 우리를 이끌어 하느님의 이름 안에, 정치적 신념에, 우리를 안심시키는 의식 안에 가두어 결국 정리된 상태로 아주아주 거대한 사랑 안에 머물게 한다. 결론적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때로는 고통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 노래는 시간에 대한 인지이다. 이 노래는 시간이고, 그 자체가 시간의 시작인 베다의 찬가이다. 베토벤의 <장엄미사곡Missa Solemnis> 중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바이올린 곡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절망, 순수한 행복을 표현한다. 그 곡 속에서 숨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멈춰 있으면, 신비로운 감각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의 원천도 바로 이것이다. 잠시 후 곡이 잦아들면서 멈출 것이다. "은줄이 끊어지고 황금 전등이 깨지고, 암포라 항아리의 밑바닥이 부서지고 도르래가 연못에 빠지고 먼지가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참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것이 시간이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SF소설이지만 또다른 면에서는 반전이 가득한 모험소설이다. 위기가 생기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기발한 방법이 등장하고, 평범한 선량함이 결국 세상을 구하게 된다는 웃기면서도 따뜻하다. 내용 중에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라일랜드가 겪는 모험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소설이다.
세상 모든 책을 읽고 싶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을 책이 줄지 않고 많아진다는 역설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불가능한 꿈을 꾼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은 집단적인 노력과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소유는 개인적이고 사적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산물이 그 생산자들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들한테 넘어가는 것이다.해결책은 명백하다. 생산의 사회화에 맞춰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권을 구축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과 사적소유의 갈등을 푸는 방법은 사회적 생산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합당한 결론으로 끌고 가는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 소유권이다.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이 남아있는 한, 반드시 써야 할 단 한 줄의 문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내내 읽고 또 쓸 것이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남지 않게 살 것이다. 나는 다만 그렇게 살 수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니까 말이다. - 대화를 마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