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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언어 -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고은지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평점 :
처음에는 엄마의 편지와 작가의 산문이 번갈아 나온다기에 구성이 참신해서 구매했다. 그래서 엄마의 따스한 편지와 거기서 이어지는 잔잔한 감동을 기대했는데 웬걸, 산문 첫 부분부터 '복수'에 대한 내용이 적나라한 문장으로 튀어나왔다.
"한국엔 전생에 자신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의 부모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다. 나는 1988년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의 오코너병원에서 태어남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억울한 누군가의 환생이었기에 엄마의 몸 한 조각을 도려내며 태어나도 마땅했다. 4.5킬로그램짜리 우량아의 정수리가 엄마의 몸을 찢었고, 어깨가 빠져나올 땐 하마터면 엄마를 죽일 뻔했다."
가족이 다 같이 타고 달리던 차에서 엄마가 뛰어내리지를 않나, 개가 작은 새를 으드득으드득 씹어먹지를 않나. 따뜻한 감동에 대한 나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이 배신이 오히려 좋았달까. 엄마의 편지가 주는 단순한 감동을 기대했던 건데, 그것이 돌고 돌아 또다른, 어쩌면 더 처절한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그 감동은 이 책의 부제에 달린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라는 문구처럼 나한테도 있었던 어떤 밤을 상기시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자의 경우처럼 부모님이 자식을 두고 태평양을 건너가버리고 9년 동안 오지 않았거나, 음식을 억지로 토하고 굶고 하는 것을 반복하거나, 자살 충동에 이르는 일까지는 (다행히) 나에겐 없었지만,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그런 밤은 나에게도 있었다.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던 그런 밤, 얼른 잠이라도 나를 구원해주었으면 싶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던 밤. 그리고 고은지 작가가 "오래전의 수많은 밤들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마음껏 울었"던 것처럼,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밤들을 생각하면서 어린 날의 나를 위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계 미국인의 책이다보니 자연히 전에 읽은 <H마트에서 울다>를 떠올리게 된다. 그 책에 약간의 신파가 있다면 이 책엔 의외로 조금의 신파도 없다. 그러므로 감동의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문장 자체는 저자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 책이 단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