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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평점 :
종이책으로도, 전자책으로도 구매한 책이다. 정말 가장 좋아한다. 기숙사 방에 갖다두고 잠자기 전마다 항상 읽고 또 읽는, 내 분신과도 같은 책.
페르난두 페소아는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가 천성적으로 가진 음울함부터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까지 모두 언어로 담아낼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그에게 귀속된 내면세계의 서술을 읽다 보면,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사람이지만 어찌도 나와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전생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정말 어쩌면 전생이란 게 있다면, 나는 그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비슷비슷한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나는 내 내면세계를 이렇게나 세밀하게 묘사해준 작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고 또 행복할 뿐이다. 아주 선명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성찰하기에 정말 좋은 책이었다.
"나는 나 자신만큼이 아니라
내가 볼 수 있는 것만큼 크다." -p.84
그런데 그가 자꾸 사용하는 '형이상학적이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대충 어떤 뉘앙스인지 짐작은 가지만 잘 모르겠다. 그 외에도 추상적인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걸 보면 나처럼 상상 속에서 사는 사람같아서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이 책을 계기로 인문서적의 맛을 알게된 것 같다. 지식을 쌓는 책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서양고전이 그렇듯이,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삶에 대해 고민해보기에 좋다. 문학만의 매력이다.
"고결한 이성의 힘으로 나는, 절대적 외계라는 진실을 사랑한다." -p. 127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페소아가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부분이었다. 이외에도 페소아는 많은 영역에 대해 조금은 허무주의적인 이야기를 내뱉는다. 가령,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을 때, 동일한 시간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을 던진다. 내가 작년에 초끈이론에 한창 빠져있었을 때, 시간의 관념을 스스로 다시 써 보면서 매우 유사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겉보기엔 마치 지구에서 5억 광년 떨어진 별을 관측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동시대에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5억 광년 전의 별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실은 모든 사람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라면? 사실 나라는 존재는 2118년에 살고 있지만, 어떠한 이유로 사건을 인식하는 데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마치 2018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관념, 현재 존재하는 '시각'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시간은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시간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인류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데까지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은 시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 연대표를 그리기도 하고 시간이란 24시간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며 시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실 시간은 그렇게 2차원적인 존재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페소아도 이런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는 절대로 무궁무진한 진리라는 존재 앞에서 주눅들지 않는다. 나와 같이 혼란을 느끼기는 하지만, 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점은 정말 본받고 싶다.
추상적 관념을 가지고 노는 그의 행동거지는 정말로 나하고 많이 닮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가 그의 47번째 자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는데, 이 책에도 그렇게 했다가는... 차라리 형광펜 잉크가 가득 채워진 대야에 책을 적시는 편이 빠를 것 같다. 10월 초에 페르난두 페소아의 다른 책이 두 권 출판되었던데, 망설임 없이 바로 구매했다. 당연하지. 내 책을 내가 산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페소아, 위대한 페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