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에서부터 숨이 확 막혔다. 소설일까? 싶으면 자서전 같고? 자서전인가 싶으면 소설 같은 기묘한 이야기로 다가온 '아니 에르노'의 어린 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로 회귀하게 했다.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 그때는 암울했던 80년대였고, 유난히 비상이 많았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지만, 아버지는 무거운 군화를 질질 끌고 화가 잔뜩 나신 채로 술에 절어 들어오실 때가 많았다.
골목 맨 끝 집에 살았던 우리는 저 멀리서 아버지의 고함과 노랫소리가 섞여 들려오면 선득선득한 기분에 휩싸여 일사불란하게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숨겼다. 그때 엄마의 눈빛은 식어버린 커피만큼이나 싸늘했고 맹수에게 쫓기는 고라니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어떤 날엔 엄마의 손에 붙들려 찾아간 곳이 쉰나가 나는 지하의 가라오케였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엎어져 있는 아버지를 보며 어린 나는 사랑의 감정보다 슬픔을 먼저 알아버렸다. 그 슬픔의 근원은 분노였을까? 아니,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다.
만취한 채로 대문을 부실듯이 돌덩이를 던지며 괴성을 지르는 아버지를 마주하며 뒷집에 살던 전교 1등이었던 그 애가 나를 어찌 생각할지 몹시 부끄러웠다. 그 애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와는 급이 다른 군인이었고 교양인이었다. 공부를 못했던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리에 그애는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그애는 서울로 유학을 떠났고 나의 첫 짝사랑은 그렇게 부끄러움으로 시작해서 부끄러움으로 끝이 났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P 137
그 흔한 메타포 없이 진행되는 서사가 몹시 낯설었다. 이것을 소설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드라마틱한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있는 장치 하나 없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에르노의 소설이 아름답다 느껴지는 건 아마도 문장을 따라가는 내내 에르노의 열두 살과 나의 열두 살이 겹쳐졌기 때문었을 것이다.
기존 소설의 체계를 무시한 채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내밀한 ‘부끄러움’ 을 낱낱이 드러낸 에르노의 소설이 더욱더 빛나는 이유가 아닐까? 아무래도 그녀의 전작주의자가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드는 오늘.
부끄럽지만, 에르노의 부끄러움 앞에 나의 부끄러움을 덜어내며 서툰 오늘을 또 그렇게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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