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듣는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114
정은 지음 / 사계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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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듣는 시간 | 정은 장편소설-제1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어른들의 관계란 그런 거야. 사람마다 적절한 거리가 있거든. 가까워지면 결국엔 멀어지지. 그런데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아주 가깝게 다가가는 어떤 지점이 있어. 사람마다 그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서 유지하는 거야. 각 관계를 교통정리 하면서. 쉬운 일은 아니지. 쉽지 않아. 하지만 보람이 있지. 보람이 없기도 하지만.” p.58


“나는 마르첼로처럼 살고 싶어. 사람을 껴안고 있으려면 이상하게 복잡해지잖아. 따져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그런데 개들은 그런 거 없이 그냥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기뻐하고 달려와 안기거든.” p.59


“수지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행동하는 방식대로 너 자신에게 행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너 자신과 친구가 되고 나면 너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거야. 불필요한 위로를 하지 않게 되지. 누구에게나 삶은 단 한 번뿐이지. 후회하지 않을 선택만 해야 해. 너의 삶이니까. 선택은 언제나 너 자신을 위해서 네가 하는 거야.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잊지 말아야할 것은, 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거야. 그 힘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의무가 있어. 그것만 잊지 말아 주렴.” p.125ᅠ


수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이다. 유난히 소리에 예민한 나는 가만가만 숨을 고르며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칠까 두려운 마음에 귀를 쫑긋거리며 온몸의 촉수를 세운 채로 수지의 조용한 걸음을 따라 들어갔다. 수지의 유일한 친구 한민이 앞을 보지 못하는 친구라는 설정이 어쩐지 끼워 맞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은 곳곳에 천사들이 뿌려놓은 따스한 햇볕 조각들처럼 작가의 반짝반짝 빛나는 문장들을 만나면서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년 동안이나 다듬은 문장이라고 하니 가히 그럴 수밖에! 


책을 읽는 내내 매우 흐린 어느 날,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낀 고요하고 깊은 호수를 끼고 있는 숲길을 홀로 걷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수지의 장애를 처음부터 존재했던 당연한 그 무엇으로 말한다. 그렇게 수지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소리가 없어도 살 수 있었다. 엄마는 그렇게 수지를 키웠다. 하지만 수지는 원하지 않았던 인공 와우 수술을 받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자신이 지켜오던 조용한 세계가 깨지면서 혼돈스러워한다. 그것은 마치 내 삶에 불안감이 스며들 때마다 깊은 물속에서 발이 땅이 닿지않아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쳐대는 듯한 두려움이었을까?


영화"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의 엄마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것처럼 할머니의 죽음 후에 수지의 엄마는 그나마 수지에게 소리를 안겨준 것으로 되었다는 듯 어느날 문득 전원이 꺼진 핸드폰과 메모지 한 장 남기고 총총총 떠나간다. 나는 몹시 두려웠다. 수지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깊은 물속에 홀로 남겨질까 봐. 하지만 작가는 참 다정한 사람이다. 수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지만 결코 떨어뜨리지는 않았으니.


서로 너무 다른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유일한 친구 한민과 서로 마주하며 때때로 엇갈리고 때론 부딪치고 어긋나기도 하지만 결국 있는 그대로의 그들의 모습을 인정하고 껴안는다. 하지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아프게 떠나 보내며 이별을 통해 수지는 한 뼘 더 성장해 간다. 물론 작가의 바람처럼 수지의 슬픔이 과하게 흘러 넘치지 않았고 그녀의 세상처럼 조용한 슬픔이라서 이 작품이 더 빛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 고모도 홀연히 떠나고 수지는 할머니가 말하는 관계의 교통정리를 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유일하게 곁에 남은 한민과 마르첼로와 함께 '산책을 듣는 시간'을 기획한다.


“나는 세상을 낯설게 보고 싶어. 사람들 내면에 이미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낯선 감각을 깨우쳐 주고 싶어. 감각을 확장시키고 재분배해서 사람의 몸이 바뀌게 하고 싶어. 몸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니까. 그걸 언어로 하면 시인이겠지? 우리는 그걸 산책을 통해서 하고 있는 거야.”


책을 덮고 나서 바로 집 앞 공원 숲길을 걸었다. 조용조용 가만가만 한민의 낯선 시선을 따라가며 수지의 조용한 세계에 귀를 기울였다.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안전하게 땅에 착지를 한 수지가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조금 울고 나니 흐렸던 세상이 조금은 더 환해졌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산책을 들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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