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품절


*모모의 귀 기울여 들어주기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모모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에게 말을 하다 보면 수줍음이 많은 사람도 어느덧 거침이 없는 대담한 사람이 되었다. 불행한 사람, 억눌린 마음이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내 인생을 실패했고,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치 망가진 냄비처럼 언제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치될 수 있는 그저 그런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모를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모모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p.24 <모모|미하엘 엔데> 중에서

오래전 나는 침묵이 몹시도 두려웠다. 누군가와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의 에너지가 어긋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땐 부모님이 안 계신 밤, 갑자기 전기가 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을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슨 이야기든 쏟아 내야만 했다. 신들린 사람처럼 떠들다 정신을 차려보면 상대는 이해할 수 없는 듯한 어색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거나, 서둘러서 그 자리를 피하곤 했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건 어린 시절 엄마와 어린 나 사이에 벌어진 틈에 흐르는 차가운 침묵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서 파생된 트라우마였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모 같은 사람이 너무도 간절하게 필요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들어주지는 못 했다.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거나, 이야기를 듣는 척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이제와서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나처럼 외롭고 삶이 버거웠을테니, 게다가 과연! 나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 마음을 다해 들어 주었던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면 나 역시 '그렇다' 라고 말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지금은 타인과 관계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침묵이나 틈이 두렵지는 않다. 그럼에도 몹시도 외롭고 삶이 아파서 서글피 울고 싶은 어떤 날에는 모모를 닮은 그이가 아무 말 없이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 옆에 앉아 온 마음으로 나의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좀 더 지혜로워 지는 날이 오면 모모처럼 나도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리라고 다짐하는 가을 밤이 속절없이 깊어만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