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저요, 하고 손이 올라갔다. 이모가 학교 교사처럼 지명해서 아이들을 웃겼다."근데, 왜 조선인이 쳐들어오죠?"이모는 잠시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짓궂은 아이는 보복이 두렵게 마련이지. 너희도 약한 아이를 괴롭히면 안 돼. 뒤탈이 두려울 것이고 잘못되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납득했다. 누구나 형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험담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이었던 만큼 이모의 비유는 적절했다. 조선인이 쳐들어온다.지토세 이모의 회고담을 들으며 우리가 느낀 동요는 40년 전 대지진 당시의 일본인이 품었던 공포심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P-1
조예은의 세계는 애틋하다. 무너진 세계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기이한 낭만의 흔적. 고어가 순정과 엮여들고, 죽음은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비극이 있어서 비로소 온전해지는 세계를 몇 번이고 경험하게 한다. 일상적인 풍경은 어떤 사건으로 완전히 짓이겨지고, 그 이후에 비로소 만나지는 세계가 주인공을 새롭게 살게 한다. - P-1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큰 상실 이후의 삶은 애도다. 슬퍼하다 화를 내고, 화를 내다 무력해진다. 그것들은 하나의 방향성만을 띠지 않는다. 서로를 오가고 이내 받아들인다. 시간이 짧든 길든,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그것이 애도고,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 P-1
"자…… 가 볼까."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혜호는 벌써 그것이 낯설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어느 틈에 승환은 그와 이토록 낯선 세계 사이에 능금꽃 같은 발자국을 남겼던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꼭 그런 경우였다. 또한 지금 그가 찾아가려는 인연도 그에게 난 자리를 남기겠지. 그것이 지독하게 쓸쓸했다. 여름 볕이 들기 시작하면 봄이 그렇듯 찬란한 외로움이 남으리라.
"삶. 삶에서의 차례요. 어떤 사람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말하는 걸 들었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고 있더라고요. 들어보니까 우리, 우리 노인들 차례는 지나갔대요. 우리가 다 망쳤대요. 탐욕이며 뭐며로 지구를 파괴했대요.""맞는 말이네요. 우리가 망쳤죠.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사회주의자들일 뿐이에요." 토비아스는 사회주의자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죄다 속을 들춰 보면 사회주의자라는 식이다. "그저 늘 다른 사람들이 고생해서 얻어 낸 걸 가로채려는 게으른 사회주의자들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