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난 위인전을 참도 싫어했다. 
내 입으로 원했던 생일선물은 꽤 어릴 적부터 아주 오랫동안 책이었고,

책 사는 일을 무척 행복해 했으며 

동화책, 설화, 만화책부터 이해하기 힘든 어른들이 읽는 소설들까지

활자중독증처럼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읽어제꼈었는데,

유독 위인전 읽기만큼은 알러지 반응이 생기는 듯이 울렁증이 이는 듯이 힘들어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모두 눈이 빨개져라 울며 읽었다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 (전태일 평전) 도  못 읽었다. 결국 세 번의 시도 끝에 몇 년 뒤에 겨우 읽어냈다.

 

그런 위인전 울렁증은 근래까지도 여전해서

영화 공부를 하면서도 영화감독들의 평전이나 감독론에는 당췌 손이 가지 않았다.

왠지 위인전을 읽으면 하나같이 착하고 멋지고 위대한 이들의 삶이

나를 옥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처럼 행동하고 살아야한다고 나를 밀어제끼는 것처럼 느껴져서 ....솔직히 아주 무서웠다.

난 솔직하지도, 용감하지도, 똑똑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아이였고

여전히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해져야 하고 용감해져야하고 성실해져야하고 똑똑해져야하고 지혜로와야하고 게다가 성공까지 해야한다고 질책해대는데 어떻게 즐겁게 그 책들을 읽을 수 있겠는가

물론 난 좀 더 솔직해지고 용감해지고 똑똑해지고 부지런해지고 또 성공도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라는 질문이

내 저 밑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속닥거린다.

좀 모자라도 그래도 나쁜 건 아니잖아.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속닥거린다.

그래, 내가 위인전을 싫어했던 건 어릴 때부터 나의 모자람을 알고 있어서였나보다.

또한 패배자들에게 더 연민을 가져서이기도 한 것 같다. 

캔디를 보면서도 캔디가 사랑받을만하긴 하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겠다는 캔디에게 난 좀 질려했었다. 캔디말고 이라이자에게 훨씬 더 큰 연민을 가졌다.
이라이자도 할 말이 있을 거라고, 나중에 크면 이라이자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야지...라고까지 생각했었으니,

주목을 받는 사람보단 그렇지 못한 인물을 내가 더 좋아하긴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패배자>는 나의 흥미를 끌만한 책이었다.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위대한 패배자>는 내가 처음으로 꽤 재미있게 읽은 위인전이다.

내 흥미가 “패배자” 에 방점을 찍었다면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은 “위대한”에 방점이 찍힌다. 

비참한 패배자이든, 영광스러운 패배자이든,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이든, 가까운 사람에게 내몰리고 끝없이 추락하고 명성을 도둑질 당하고 영광의 시간을 박탈당한 패배자이든 ( 목차임 ) 그들은 어쨋거나 위인전에 오를 법한 걸출한 인물이거나 천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울렁증을 부추기지 않은 이유는 또한 모두 하자가 있는 인물들로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패배자로 거론된 천재들도, 그의 곁에서 대신 승리를 쟁취한 승리자들도 인격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여러 하자와 결점들이 있고 실수투성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위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뀌었거나 아니 위인을 포장하는 방법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위대한 패배자>에 나오는 많은 패배자와 승리자의 모습은 모자라서 훨씬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훨씬 더 다가가기 쉽게 한다. 그들에게서 교훈을 취하기가 쉬워졌다는 것이다.

때론 작가 볼프 슈나이더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게 되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재미있는 책이다.

 

책의 편집에서는 그 어떤 악의없는? 장난같은 것도 느껴졌다.

책은 골리앗, 막시밀리안 황제, 롬멜, 체 게바라, 고르바쵸프, 엘 고어, 메리 슈트어트 여왕, 렌츠, 라살, 트로츠키, 오스카 와일드, 게오르크 뷔히너, 빈센트 반 고흐까지 패배자들을 열거하더니 맨 마지막 챕터에서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인생들” 이란 제목으로 덩샤오핑, 윈스턴 처칠, 리처드 닉슨을 소개했다.

에? 갑자기 왠 오뚝이! 비교해보란 건가? 칫-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데

떡- 하니 나타난 처칠의 사진!

그 많은 처칠의 사진 중 하필이면 이걸 골랐을까? 처칠하면 떠오르는 파이프를 물고 썩소를 날리고 있는 사진도 있는데... ㅡㅡ;; 

 

노년의 처칠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진.

실제로 80이 넘는 나이에 은퇴를 하면서도 아쉬워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는 소개에 어울리는 사진이긴 했지만

수많은 이유로 패배자가 된 걸출한 인물들의 패배담을 계속 듣다가 흐릿하기까지한 그들의 작은 사진들을 보다가 만난 처칠의 사진에 (한 페이지 전체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난 ... 간담이 확 쫄아드는 느낌을 느꼈다.

위인전을 읽던 어린 날처럼 뭔가 모를 공포가 솟았다.

결국 . . .

한 손으로 사진을 가리고 그 페이지를 읽었다 ㅡㅡ;;

글을 쓰며 또 그 눈이 생각나 부르르 몸이 떨린다.

그러고 보니 충분히 악의있는 장난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지나가다 이름이라도 들었던 많은 승리자에 비해 잘 모르던 또 다른 위인들의 이름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고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음은 틀림없다.

야사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런 재미를 지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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