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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리 홀 원작,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박선영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01년 이미 영화로 보고 흠뻑 감동했던 이야기, 빌리 엘리어트를 7년이 지나 소설로 다시 만났다.
영화에서도 내가 가장 뭉클했던 장면은 빌리가 환희에 차서 동네 골목을 뛰어 다니며 신들린 듯이 춤추는 장면과 아버지가 고민 끝에 함께 파업을 하고 있던 동료들을 등지고 탄광으로 들어가는 버스에 탄 장면이었다.
이번에 새로 읽은 소설에서도 여전히 가장 감명깊은 장면 중에 이 두 장면이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이 장면장면들은 영화와는 또 다른 깊이의 울림을 내게 주었는데, 그 이유는 단연코 소설이 쓰여진 방식에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 방식은 바로 <다중 일인칭 시점>이다.
장기파업 중인 탄광촌 소년 빌리가 권투가 아닌 ' 돈을 쌓아놓고 사는 중산층 계집애들'이나 하는 발레를 하게 되고 결국 발레리라가 되길 원하는 이 이야기는 빌리와 아버지 재키, 형 토니, 권투선생 조지, 빌리 친구 마이클, 전당포 주인의 입을 빌려 서술되고 진행된다. 그러니까 각 장의 서술자 모두는 '나' 인 것다. 빌리가, 아버지 재키가, 형 토니가 투박한 말로 서로를 헤집어 대지만, 그 말본새와 달리 그들 각자가 어떤 고통에 흔들리고 있는지,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가 더 생생하고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어서 그 감동을 배가시키고 있다.
아버지 재키의 눈물을 훔쳐주고 싶다.
2001년 영화 개봉 당시, 영화 평론가 박평식은 20자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은 아비를 울리고 자식은 그 눈물을 마시고"
평론가에게도 로얄발레학교에 가고 싶다는 빌리를 위해 그 오랜 기간 수많은 어려움에도 지켜오던 파업을 포기하고 배신자가 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가슴 저몄었나 보다. 누구든 동료들과 동네사람들, 그리고 함께 파업을 하고 있던 첫째 아들 앞에서 배신자가 되어 버스에 오르고 싶겠는가. 소설 속에서는 버스에 오르는 재키의 고민과 고통이 더 가슴을 후벼팠다. 버스 안에서 엉엉 우는 재키의 모습에 나는 나 모르게 우셨을 어떤 날의 내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이 잘 된다는 데 물불 가릴 부모가 있을까? 사실 그래서 교육열도 높은 것이고, 이 나라의 이상한 영어 광풍을 욕하면서도 자식 영어학원 안 보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부모이다.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자신이 생각한 것 중 제일 좋은 방법으로 자식에게 무언가 끊임없이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이다. 장작이 없어 피아노를 부셔 땔감으로 써야 할 만큼 열악한 상황에서도 피같은 돈을 내어 빌리에게 권투를 가르치려는 재키처럼.
여느 탄광촌집 자식들과 다르게 여리고 어리벙하고 좀 뒤쳐진 빌리가 무엇이 될 지, 무엇이 좋은 지 재키는 영 알기 어렵다. 하지만 재키는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서 그래도 사내라면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빌리에게 권투를 가르치는 것이다. 링 위에 서서 주먹은 뻗지 않고 이상한 발놀림만 하다가 대자로 뻗은 아들 빌리를 보며 한숨 짓고 답답해 하는 이유는 세상이 끊임없이 날리는 주먹을 아들은 되도록 맞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키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 발레하기를 아들 빌리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알았을 때 재키는 '세상에 맞서는 방법'을 자기의 방식으로 가르치기를 포기한다. 권투라면 모를까, 발레의 세계를 재키가 알 리가 없다. 알 수가 없다. 경험은 커녕 꿈에서조차 보지 못한 일이기에.
'내 아들에게 기회를 주자. 내가 가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길이지만, 내가 가지지 못하고 가질 수 없었던 기회일 수도 있다. 안 좋은 결과를 빚을 지도 모르지만, 기회를 가지는 것은 결과랑은 다른 문제니까.' 라고 재키가 생각했던 게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일에 아들의 생을 거는 일을 그 어떤 아버지가 쉬이 할 수 있을까. 그런 불확실하고 어려운 길을 누가 '기회'라고 생각하기 쉽겠는가. 하지만 재키는 발레선생의 말이 아닌 춤으로 자신에게 처음 대든 아들의 열광을 보며 그 길을 감내하고자 결심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재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함께 눈물을 훔친다.
그의 가슴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주고 싶었다.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는 부모로서의 재키가 아니라 삶에 자꾸 내몰려 팍팍하고 위태로운 순간에도,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만큼 감내하기 어려운 고단 중에도 자식이 무엇에 미쳐있는지 속 내어 볼 줄 아는 아버지 재키이기에. 그 미친 놈이 하는 것이 재키 스스로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기회로 볼 줄 알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고자 고군분투하는 재키이기에.
자식을 위한다면 물고기를 잡아 줄 것이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산으로도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사냥하는 법을 가르칠 수도, 따라갈 수도 없지만 말이다. 재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쳐봤어? 안 미쳐봤으면 말을 하지마. vs 양단 몇 마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춤을 추고 팔을 벌려 돌고 돌고 또 도는 빌리의 모습을 보라. 상상해 보라.
그 어떤 누가 울컥, 가슴 치밀지 않을까.
스스로도 미쳤어, 미쳤어, 이건 사내아이가 할 일이 아니야 라면서 다시 춤추고 있는 빌리가 내게
'미쳐봤어? 안 미쳐봤으면 말을 하지마.' 라고 할 것만 같다.
맞아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 앞에서 미친 듯이 펄쩍 펄쩍 춤을 추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대목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하~'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손으로 가슴 언저리를 쓸고 쓸고 쓸어 내렸다.
난 빌리에게 말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미쳐 봤냐고 자문했을 때 그렇다고 얼른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 언저리가 싸해지는 이유는 내게도 미쳐보고 싶은 것이, 빌리의 춤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누가 꿈 꿔 보지 않은 이 있을까.
세상에 누가 자기 꿈에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보고 싶지 않은 이 있을까.
세상에 누가 그런 미칠 듯한 열정에 휩싸이는 그 무엇을 가져보고 싶지 않은 이 있을까.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루지 못한 일이기에, 갖지 못한 것이기에 가슴 아리고 휑한 것이다.
또 한편 그래서 빌리의 춤에 감응하고 빌리를 응원하게 되고 함께 가슴 벅차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들던 와중에 갑자기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박은옥의 '양단 몇 마름' ......이 왠 생뚱맞은 !
노래 가사는 이렇다.
< 양단 몇 마름 (박은옥) >
시집 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 옷장 속 깊이깊이 모셔두고서 /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 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 /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 만져보고 펼쳐보고 둘러만 보고 /
시집 올 때 가져온 꽃신 한 켤레 / 고리짝 깊이깊이 모셔두고서 /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 쳐다만 보고 닦아도 보고 /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 만져보고 쳐다보고 닦아만 보고 /
만져보고 펼쳐보고 둘러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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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노래 가사를 한 번 다 훑고 나니 내 가슴에 내가 못질한 것 같다.
평상시 잊고 지내던 애써 묻고 지내던 꿈이란 놈, 거기에 미쳐버리고 싶은 열정이란 놈,
내 그것들이 노래 속에서 양단 몇 마름이고 꽃신 한 켤레 같이 느껴졌다.
난 그걸 옷장 속에, 고리짝 속에 고이 모셔두고서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서
이렇게 생각나면, 자극 받으면 한 번씩 꺼내서 술안주로 삼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꿈이 이랬어, 난 이게 되고 싶었어. 난 이게 하고 싶었는데.... 사는 게 힘드네...이러고 푸념거리로, 세상이 날 안 알아줘...라며 내 불행의 핑계거리로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결국, 사는 게 다 그런거지 ...라며 장끼 숨듯 슬쩍 내 게으름과 포기를 외면하고 있었던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어두운 구석으로 마구 뻗친다. 스스로에게 거칠게 물어댄다.
' 책상 앞에 앉아 골몰하는 빌리를 상상할 수 있어? 춤은 추지 않고 진짜로 로얄발레학교에 갈 수 있을까, 없을까? 그 확률이 어떻게 될까? 시험기출문제라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는 빌리를 보고 넌 감동할 수 있어? 빌리에게 책상이란 고민을 위한 팔꿈치 고임대가 아니라 또 하나의 춤추는 장소였다구! 하지만 지금 넌, 책상앞에 앉아 울상짓는 빌리야 '
아 - 아 - 아.프.다.
다시 한 번 빌리가 내게 말한다.
' 미쳐봤어? 안 미쳐봤으면 말을 하지마. 난 널 위해 춤추지 않아. 너의 응원을 바라지도 않아.'
감동따위, 대리만족따위 하지말고 너도 미쳐라, 미쳐봐라라고 빌리가 나를 질타한다.
그렇게 빌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발자욱만, 한 발자욱만. 너 스스로에게 기회를 줘. 그게 용기야.
빌리가 다니는 권투도장이 있는 건물에서 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빌리는 어떻게 됐을까?
공사를 피해 권투수업 옆 구석으로 온 발레교습에 빌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빌리는 발레에 자신이 소질이 있는 지 어떤 지, 미칠 수 있는 지 어떤 지 전혀 알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빌리는 그리 크다가 아버지 재키를 따라, 형 토니를 따라 탄광 갱도로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사그러드는 영국 탄광촌의 마지막 광부가 되었다가 삶을 비관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뭐, 공사를 하지 않아 빌리가 발레 교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면 그건 운의 문제겠지만
바로 목전에서 하는 발레에 관심을 보이고 생긴 관심을 발레 바를 잡고 다리를 들어보이는 행동으로 표현한 건 바로 용기다. 라고 생각한다. 될 지 안 될 지, 좋을 지 아닐 지를 미리 가늠하지 않고 누가 어찌 볼 지 뭐라 할 지 재지 않고, 혹은 그것을 이기고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는 행동이 용기다.
아버지 재키가 빌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사실 빌리가 스스로에게 기회를 줬던 그 순간의 망설임과 떨림 또한 또 큰 감동이었다. 책을 덮고 되돌려 떠올릴 수록 빌리는 용기있는 아이였고 그 용기가 그의 삶을 바꿨다고 생각되었다.
살면서 미치고 싶은 것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아니면 고리짝 속에 넣어 둔 것 말고 달리 스스로 미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는 지 알고 싶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나도 모르게 자꾸 입에 붙는 말이 ' 나이가 들어서 그런 지...' 다.
얼핏 흥미가 이는 일을 만나도 재미있겠네-하곤 무성의하게 흘러가게 둬 버릴 때, 저거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하곤 스쳐지나가버릴 때, 어떤 일을 만나도 심드렁하니 성誠을 내지 않을 때, 입술 사이로 비져 나오는 말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지...다.
내 용기 없음을 자꾸 나이 탓한 것이다. 하지만 산을 옮기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재키처럼 배신자가 될 기로에 선 것도 아닌데, 그저 빌리가 한 것과 같이 바를 잡고 다리를 들어보는 용기를 내는 것쯤은 나이랑은 상관없지 않을까? 그것은 그저 한 걸음 내딛는 일인데. 자기가 가진 흥미에도 열심을 내지 않은 것은 자기에 대한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행동이 되는 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도 그런 건 나이랑 상관없다.
빌리가 말한다.
당신도 같이 해볼래? 쉬워, 쉽다니까
자, bar를 잡아. 그 다음에 다리를 올려!
새로운 것, 어색한 것, 모르는 것, 나 늙어가는 것 상관말아야 겠다. 부지불식간에 내 옆으로 어떤 발레교습장이 이사 오고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다면 바를 잡고 다리를 한 번 올려 보리라.
아니면? 해 봤는데 재미없으면? 말지 뭐. 다음에 또 다른 바를 잡고 다리를 번쩍 올려보지.
그러다보면 하나쯤 걸리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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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니 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영화가 새로이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