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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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은 매섭게 불어오고 들려오는 뉴스는 온통 심난한 얘기들뿐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우울한 기운이 모두를 덮치려 하고 있다.

아! 정말이지 요즘 같은 날이면 남쪽으로 튀어버리고 싶다.


원제サウスバウンド(south bound), 번역서 남쪽으로 튀어. 제목에서부터 재기발랄함이 묻어난다.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튀어버린다니.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일까.



이 책에는 젊은 시절 과격파 운동권 출신인 지로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늘 이야기한다. “학교는 안 가도 좋아!” “콜라와 캔 커피는 금지다!” “국민연금은 낼 수 없어! 국민연금을 내야 한다면 난 국민을 관두겠어!” 라고. 이런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사춘기 소년 지로(정확하게는 사춘기에 막 접어들려고 하는 지로)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지만 용케도 잘 버텨낸다. 현실이 이 정도라면 우울한 날들의 연속일건데 오쿠다 히데오는 일련의 사건들을 코믹하고 경쾌하게 잘도 풀어낸다.


오쿠다 히데오의《공중그네》나 《인 더 풀》 같은 다른 작품에서도 살짝 현실감이 떨어지는 주인공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황당한 주인공들은 우리 모두가 한 번은 꿈꾸고 싶은 인물들이 아닐까 싶다. 마음은 있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소심한 이들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말이다.


이 책은 막 사춘기로 접어든 소년 지로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면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과 이상을 끝까지 좇는 어른들의 이야기이도하다. 유별난 아버지 덕분에(?) 온 식구가 남쪽으로 향하기까지의 과정을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맛깔나게 표현하고 있어서인지 지로가 느끼는 학교 생활의 갈등과 외가 식구들과의 만남, 남쪽 섬마을의 묘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책을 읽을 무렵 마침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남쪽 섬으로 여행을 하자니 그 곳 어딘가 꼭 지로네 식구가 살고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도 인적도 드문 작은 섬 하나를 목표로 남쪽으로 튀어 볼 계획을 잡았었는데 결국 그 섬을 포기했다. 하루에 배편이 한 번 밖에 없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루 여행하는 일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온 가족이 이주를 결심하고(아버지의 독단이긴 하지만) 터전을 잡은 모양을 보니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지로 또래의 아들이 이 책을 읽고 있길래 네가 꿈꾸는 남쪽은 어디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꿈꾸는 남쪽은 매일매일 맛있는 스테이크를 엄청나게 먹을 수 있는 지로네 외가라는 답과 함께, 공중제비가 능숙한 지로가 너무 부럽다며 필살기를 익혀야겠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쪽을 꿈꾸고 원하지만 각자 꿈꾸는 남쪽은 다르다.

지로네 가족은 누가 뭐라고 하든 그 꿈을 이루었다. 현실이 팍팍해서, 용기가 없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그 꿈을 포기하고 사는데 반해 용감무쌍한 지로 아버지는 어쩌면 모든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날 즐겁게 해 주던 지로네 가족.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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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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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작가라서 내용이 너무 대중적이지 않을까. 순정만화를 글로 옮겨놓은 듯하다는 일본 국내의 평도 받았던지라 소녀 취향의 로맨스가 주 내용을 이루지 않을까. 이러한 선입견을 먼저 갖고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할머니》《티티새》《왕국》등을 읽으면서, 왜 이 작가는 한 가지 이야기만 하려는 걸까. 매번 같은 주제와 비슷비슷한 주인공들을 내세우는 건 자기복제가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하던 차에 《키친》을 접하게 되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첫 작품이라는 얕은 정보만을 가진 채 이 소설을 다 읽어 내려갔을 때는, 어딘가에서 꿋꿋하게 슬픔을 헤쳐 나가고 있을 수많은 미카게와 유이치에게 정말이지 열렬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졌다.

타인에겐 보잘 것 없는 공간일지라도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는 낙원일 수가 있다.

미카게에겐 부엌이 그런 공간이다. 할머니를 여의고 전혀 연고가 없던 유이치의 집으로 들어가 색다른 동거가 시작되었을 때도 그녀의 가장 편안한 쉼터는 부엌이었다. 엄마이자 아빠이며 인생의 동반자였던 에리코씨를 떠나보내고 망연자실해하는 유이치를 보듬으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공간도 부엌이다.

출장 겸 여행을 떠난 미카게가 맛있는 돈까스 덮밥을 먹다가 유이치 생각이 나자 도시락 포장을 부탁한 후 택시를 대절해서 그가 머무는 곳으로 달려간다. 대절한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짧은 시간동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어도 서로의 감정은 확인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란 걸…….

세상을 살면서 우린 많은 슬픔과 고난을 만나게 된다. 가장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슬픔이지만, 미카게와 유이치같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누군가가 있다면 훨씬 극복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키친》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참 따뜻한 소설이구나. 하지만 왠지 낯익다.

낯익었던 이유는 작가 후기를 읽으면서 풀렸다. 왜 그토록 상처와 치유라는 한 가지 주제와 비슷한 분위기의 여주인공들을 내세웠는지 알게 되었기에.

요시모토 바나나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날부터 오직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 소설을 썼고, 그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질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 책은 그 집요한 역사의 기본형입니다.’

왜 이런 후기를 지금에야 보게 되었는지, 작가의 이런 의도를 미리 알고 다른 작품들을 접했더라면 좀 더 따뜻한 가슴으로 주인공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키친》은 베스트셀러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아주 대중적이지 않다고 본다. 소녀가 등장하지만 한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에 소녀 취향이지도 않다. 이로서 나의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한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키친》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선입견을 가지고 대한 다는 건 말 그대로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준 고마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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