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문장론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허세의 문장론? 아니 헤세의 문장론! 내용

‘허세’의 문장론?

나 같은 애매한 나이 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드립인 ‘눈이 침침하여’ 제목을 잘못 읽었다. 

웬 노인네 ―알고 보니 헤르만 헤세― 얼굴이 딱 하니 있었지만,

내가 이 대문호 얼굴을 알 리 없다.

‘허세’의 문장론이 반의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근대, 응?

‘아, 헤세의 문장론’

게다가 저자는 헤르만 헤세 본인이다.

헤르만 헤세가 지금 시대에 있었으면 블로그를 했다면,

딱 그런 글을 모아 놓은 느낌이다.

헤세의 블로그를 출력한 느낌이다.

헤세가 생각하는 문장에 관한 일종의 철학을 편안하게 ―나한테는 게보린을 찾게― 설명한다.

‘너가 무식해서 재미 없는 거야’라는 소리를 감수하더라 재미면에서는 별 두 개만 준다.

헤세의 글에 취해 지식 허세에 취해보고 싶었지만 내 한계는 여기까지 일세.

스페인어할 줄 아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식탁에 자기들 끼리 스페인어 농담하는 사람 사이에 눈치 보며 앉아 있는 기분이다.

우선, 헤세는 책을 소개한다.

책 서평을 하고 작가를 추천한다.

문제는 그에게 동시대는(1900부터 1960년)이다.

게다가 독일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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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를 많이 하면서 고트프리트 켈러를 매우 좋아하면서 베르펠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온종일 휠덜린을 읽으면서 행복에 잠길 수 있고, 시켈레의 벤칼에서 내게 많은 선물을 하는 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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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르는 작가며 책이다.

알아야 공감하고, 공감해야 흥미 있고, 흥미가 있어야 빠져들지.

나의 무지를 재차 확인하는 시간일 뿐.

그래도 붙잡고 있었던 것은 그 헤르만 헤세,

알에서 깨어나라라던 헤세지 않나.

아브락사스라도 만날 요량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붙잡았다.

아쉽게도 내용에 함몰이 안 되다 보니 책에서 많은 것을 건지진 못했다.

아마 온갖 명품 브랜드 사은 행사에 브랜드를 몰라서 못 가져온 꼴이다.

판매원 : ‘손님 이거 정말 싸게 딱 하나 남은 상품입니다. 이거 가져가세요. 진짜 명품이에요’

나 : ‘뭔데요, Goyard?, 마당으로 가라? 웬 장바구니가 이리 비싸요?’

하면서 70% 세일하는데도 불구하고 놔두고 온 꼴이다.

문학의 배경지식인 스키마가 없어 <헤세의 문장론>을 즐길 수 없는 게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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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책 읽는 독자 분류법

인상 깊은 내용.

그 중 계속 되짚어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

193페이지부터 199페이지 <책읽기에 대하여> 편이다. 

헤세는 나름대로 독자를 세 유형으로 나눈다.

보통 예상한 유형이 아니라 눈이 간다.

책을 요약하면 이렇다.

책을 읽는 유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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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순진한 독자.

식사하는 자가 음식을 집어 들 듯 책을 집어 든다.

그런 자는 배불리 먹고 마신다.

말과 마부의 관계이다.

책은 이끌고 독자는 따른다.

대단히 교양이 많은 독자이며 세련된 독자이고 순수 문학 애호가들도 있다.

작가의 관점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작가의 세계관에 푹 빠져 있고 감정이입 한다.

작가가 자신의 인물에 부여한 해석을 남김없이 넘겨받는다.

이런 순진한 독자는 읽을거리와 관계에서 주체적 개인이나 자신이 될 수 없다.

책이란 충실하고 주의 깊게 읽히고, 그 내용과 형식의 진가를 인정받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빵은 먹으라 있는 것이오, 침대는 자라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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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천재적인 놀이 본능을 가진 독자

하지만 빵을 산으로 생각하고 터널을 만들 수도,

침대는 동굴이나, 정원 또는 눈밭이 되기도 한다.

책의 가치를 평가할 때 소재나 형식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독자는 마부를 따르는 말처럼 작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짐승의 발자국을 쫓는 사냥꾼처럼 작가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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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훌륭한 독자라고 칭하는 것의 대척점

너무나 개성적이다.

너무나 주관적이다.

그래서 자신의 읽을거리에 완전히 자유롭다.

이들에겐 책이라고 특별하지 않다.

라면 받침대나 책이나 다르지 않다.

이 독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논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성과가 많을 수 있다.

멋진 구절, 지혜나 진리를 시험 삼아 뒤집어보기도 한다.

또 연상에 의해 사고를 높이 평가한다.

시시껄렁한 전단지에서 우주론이나 철학, 에로틱 문학을 읽을 수 있다.

괴상한 상표에도 그 단어와 철자, 울림을 가지고 놀며 지식과 추억, 사념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한다.

양탄자의 문양이나 담벼락의 기하학적 모양조차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만큼 소중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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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해력 키우기, 비판적 키우기, 핵심 내용 파악하기 등 모든 독서법 책이 첫 번째 유형이 아닐까 생각된다.

둘째 유형까지도 상상력이 닿는 영역이다.

하지만, 세 번째 유형의 독자는 어떤 모습인지 가늠이 안 된다.

흔히 우리가 아는 ―바보인지 천재인지 헷갈리게 하는― 천재가 보는 시각일까?

수학 공식을 보며 그 도출된 방식이 한편의 코미디 같아서 박장대소하는 수학자 같은 것인가?

헤르만 헤세는 이 단계까지 있는 것을 알기에 나눴을 것이다.

놀랍다.

그가 보는 세계는 도대체 어떤 것 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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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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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읽고 생각했다.

‘도대체 알에서 깨어나서 신에게 날아가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문득,

세상이란 책을 저 세 번째 독자처럼 읽게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from http://blog.naver.com/nomore_bet/70188498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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