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골라라

문학 글쓰기 책은 즐겨보진 않지만,

소설가라는 인물 자체는 흥미롭다.

마치 고흐 작품을 깊이 있게 감상하기보단 그의 잘린 귀에 담긴 스토리를 쫓듯 말이다.

아마,

스타일 때문인 것 같다.

패션센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글쓰기에 대해 스타일을 가지고 싶다.

순전히 자기만족이다.

소설을 쓰려는 것도 아니다.

실용 글쓰기, 논리적인 글쓰기에 스타일이란 게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귀 움직이기 연습하기 같은 실용적인 목적없는 순수 내적 동기에 가깝다.

잘 쓰고 싶다기보다 나만의 문체, 스타일을 가지고 싶다.

‘글 개판이네!’ 소리를 들어도 뒤이어 ‘누가 쓴진 알겠어’ 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늙어서 내가 쓴 멋들어진 문체의 유서에 나의 자손들이 엄지손가락 번쩍 들며 ‘역시, 아버님’이라고 하길 바란다.

방법을 모르니 글쓰기 뮤즈가 올 때까지 사람들의 글쓰기 방법론을 엿보고 있다.

그래서 문학 글쓰기는 안 보지만 작가 그 자체에 관한 책엔 관심 있다.

막연히 가지고 싶은 스타일은,

더글라스 애덤스의 가히 우주적인 스케일의 블랙 유머와,

알랭 드 보통의 서로 멀리 떨어진 두 개념을 패스파인더 처럼 연결 루트를 찾는 비유와,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 ‘퍼레이드’에서처럼 잔인한 장면을 수채화처럼 묘사할 수 있는 능력 등.

그런 이유로 이 책을 골랐지만,

환상적인 작가들 라인업 때문에 무릎 꿇고 공손히 읽어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작가들을 인터뷰할 수 있다니?

파리 리뷰라는 잡지가 대단하긴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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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다!

가독성이 좋고,

지루하지 않다.

질문하는 사람 역량 또한 뛰어나서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계속된다.

서로 박진감 넘치게 실수 없이 쭉 주고받는 탁구 경기다.

물론 까칠한 작가도 있다.

상대적으로 옛 작가들,

윌리엄 포크너, 헤밍웨이 같은 양반들이 조금 깐깐하다.

압도적인 카리스마 때문에 인터뷰어도 스트라이크 존에 빵빵 돌직구 날리길 망설인다.

데드볼로 타석에 들어선 작가의 기분을 맞출까 봐 그런 걸까?

그에 비해 무라카미 하루키라든지,

오르한 파묵, 

옴베르트 에코같이 지금도 작품 쓰고 있는 작가들은 인터뷰 자체를 편안해 하는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소설가라는 직업이 피라미드 쌓기처럼 주기적이고 꾸준함이 필요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술 먹고 뮤즈에 이끌려 쓰는 그런 직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참 매력적이다.

소설가는 늘 소재를 찾기에 세상이 지루할 틈이 없다.

온 세상이 흥미롭다.

혈기왕성한 사춘기 남학생이 나체 아마존 행성에 던져진 꼴이다.

일분일초가 늘 흥분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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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라인업

사람들은 누구 인터뷰부터 읽을까?

궁금해진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작가가 제각각이겠지만,

아무래도 하루키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난 세 명 중에서 고민했다.

너무나 잘 아는 하루키,

혹은 옴베르트 에코,

이 양반 소설을 보면 이게 백과사전인지, 소설인지.

혹은 윌리엄 포크너,

이 양반 소설은 안 읽어 봤지만,

수 많은 영미 작가들이 이 양반의 ‘소리과 분노’에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안다.

결국,

목차 순으로 옴베르트 에코부터 골랐다.

옴베르트 에코는 내 상상과 달리 여유로운 인상이다.

그의 작품에 녹아있는 방대한 지식을 보고 있자면,

톱니바퀴 돌아가듯 신경질적인 편집증 환자가 아닐까하는 편견이 있었다.

반대로,

이름 때문에 왠지 낭만주의자일 것은 밀란 쿤테라는 일목요연하고 구조적인 답변이 눈에 띄었다.

정말 배역으로 배우의 실제 성격을 알 수 없듯,

소설로 작가를 알 순 없구나 생각이 든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를 보자면 험난하게 사는구나 생각이 든다.

터키의 치부에 대해 양심선언 한 파묵은 자국에서 조국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 취급이다.

터키 사람들은 ‘Et tu, Brute?(브루투스 너마저?)’ 취급이다.

이렇게까지 조국과 갈등이 있는지 몰랐다.

그 치부는 바로 옛 터키가 행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Genocide)다.

헤밍웨이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글쓰기 기법에 대해 묻는 것을 진저리 친다.

어떤 가치에 대해 그것을 말하면 가치가 잃어버린다는 미신이 있듯,

글쓰기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역시,

하루키 인터뷰가 가장 흥미진진하다.

당연히 그의 작품 대부분 알고 있기에,

작품과 등장인물에 관해 얘기를 할 때마다 빠져든다.

이언 맥큐언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소설가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가 쓴 작품을 가장 먼저 보고 싶었다.

인터뷰로 엿볼 수 있는 그의 소설들은 유괴당한 아이, 토막 난 몸뚱이, 한 쌍의 끔찍한 개, 무서운 풍선 사고 이야기 등 자극적이지만,

효과적인 글쓰기로 잘 녹아낸다고 평한다.

무엇보다 잔인하고 풍자적이며 신랄한 맛을 가진 블랙코미디 코드가 내 입맛에 딱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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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드는 세 가지

첫째, 질문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구나.

어떤 작가 인터뷰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반면 어떤 것은 뭔가 탁탁 막힌다.

작가가 까칠해서 일지 모르지만,

작가 역시 인터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느낌도 든다.

작가가 신나서 떠들게 하는 것도 재주인 것 인터뷰어의 능력이지 않을까?

사전에 준비가 철저히 해야 작가의 흥미를 끌 수 있다.

예를 들어,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구별하지 못한 여성의 3mm 살짝 커트를 딱 집어서 이렇게,

‘머리 스타일이 바뀌셨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뭔가 다음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미묘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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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시인이 다시 보인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다.

‘저는 실패한 시인입니다. 아마도 모든 소설가들은 처음에는 시를 쓰길 원했겠지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단편을 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편에 실패하면 장편을 써보는 것이지요.’

연예인 중 연예인 같이 작가 중 작가 대우받는 한 명이 바로 포크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도 포크너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나는 책 한 권을 읽었고, 내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그 책은 저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어요.’

그런 그가 실패한 시인이라고 말하다니.

그 외 곳곳에 소설가들은 시인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리스펙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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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문학적 소양이 참으로 부족하구나.

여기 나온 작품 중 내가 읽어 본 게 몇이나 될까?

특히 윌리엄 포크너의 경우 영자신문에 칼럼 심심치 않게 인용문으로 등장한다.

작품을 모르면 칼럼을 읽다가 이게 뭔 소리지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문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 인용구의 뜻을 단단히 착각할 때도 있다.

혹은 그런 장면이 있었나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정말 내가 유명한 작품들을 읽어서 아는 건가 궁금해진다.

노인과 바다를 내가 읽어서 아는 건지,

이런저런 매체에서 주워들어서 아는 것인지.

어쨌든,

문학적 소양을 끌어올리기 위해 나만의 작고 개인적인 르네상스 시기를 가져야 하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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