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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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T

무라카미 하루키 저

늘어지는 주말 오전,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펼쳐 보기 딱 좋은 책. 깊은 사유에 빠지기엔 살랑살랑 오전의 공기는 내 기분을 둥둥 들뜨게 만든다.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난 처음으로 하루키의 사소한 이야기에 내 귀를 맡겼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할 일의 늪에서 오랜만에 벗어나 그의 세상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하루키의 티셔츠 수집 본능은 날 신기하게 이상한 방식으로 위로했다. 아무리 세상과 부딪히며 사는 게 힘들어도, 혹은 정신없이 사느라 며칠이 훅 지나가도 인생의 번외편으로 취미가 주는 재미를 만끽하며 사는 나 자신이 어딘가 내 안에 계속 숨 쉬고 존재하고 있구나, 이러한 생각의 환기가 이번 달 내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유명한 하루키도 책으로 만나본 적이 없을 만큼 다독하는 사람은 아니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니 어디 가서 취미로 '독서'를 꼽진 말아야겠다. 엄마가 좋아하던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게 언젠가의 목표였는데, 왠지 손이 잘 안 가게 되더라. 장편 소설은 항상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그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내용도 없는 이 책을 읽으니 그렇게 미루던 하루키의 소설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금 쌓여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고 다음 책을 사러 서점에 가게 되면 아마 하루키가 가장 먼저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워낙 에세이를 좋아해서 이 책이 유독 마음에 들어 그런 걸까, 아니면 특유의 문체에 반해 하루키를 벌써 좋아하게 되어버린 걸까 그건 아마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보면 금방 나올 답이겠지.

시원한 쿠어스 라이트를 차분하게 마시고 주위 사람들의 술렁임과 접시나 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혹은 이국의 공기를 주의 깊게 들이마시면서 치즈버거 접시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로소 '아, 그렇지, 또 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솟아난다.

25쪽

재산의 규모가 억 소리 나는 단위에 이를 텐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꾸밈이 없을 수가 있는지 하루키라는 사람이 가진 매력은 상당한 것 같다. 업과 여가를 모두 완벽의 경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뿜어내는 여유와 그로 인한 겸손은 정말 삶에 대한 의욕을 샘솟게 만든다. 밸런스가 아주 잘 조율되어 맞춰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니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않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유쾌함을 지닐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직업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이런 사소한 취미가 내 삶 구석구석에 묻어져 나오게끔 투자하는 것, 그게 아마 하루키를 이렇게 롱런할 수 있게 하는 비결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 책 하나만으로.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세계를 모순이나 구멍 없이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니 그 안에서 나온 결과물은 좋을 수밖에 없을 거다. 하루키의 일상은 정말로 그의 책이 얼마나 좋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사적인 영역을 이정도로 잘 채워 놓고 사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하든 믿을 만한 사람이다. 이는 내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상대의 일상을 면밀히 살펴보는 이유 중 하나다. 바쁜 삶을 잠시 내려놓고 위로를 받으러 잠깐이라도 훅 떠날 어딘가가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그 사람이 이제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예상이 되는 지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나에겐 그러한 곳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봐야 할 영화, 가고 싶은 카페, 구경하고 싶은 책이 쌓인 서점이 여러 군데 생각나는 걸 보면 그냥 막 산 인생은 아닌가 보다. 힘들어도 돌아갈 구석이 있다. 이게 그토록 나에게 위로가 될지 몰랐다.

워낙 레코드라는 걸 좋아해서 철들었을 때부터 용돈을 털어서 마구 사 모았다. 갖고 싶은 레코드가 있으면 점심을 굶어가며 돈을 모아서 샀다.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여전히 레코드를 사 모으고 있다.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정신없이 레코드를 찾으며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사 온 레코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냄새를 맡기만 해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46쪽

일전에 썼던 글이 떠올라 덧붙인다.

"내가 특별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담은 엽서들이 방 곳곳을 차지하기에 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영감을 얻기도, 위로를 받기도, 공허해진 마음에 충만함을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텅 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금 재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내 방벽 엽서는 작지만 어떤 것보다도 날 확실히 안심시켜준다. 새벽은 평화롭지만 그 평화로움과 공허함은 한 끗 차이이기 때문에 가끔 마음이 불안해질 때도 있다. 그래도 방 불을 끄고 무드등을 켰을 때 주위를 둘러보면 불안은 걷혀지고 마음이 절로 몽글몽글해진다."

"좋은 기억은 스쳐 지나가기가 너무 쉽다. 어느 순간 그 좋았던 순간은 당연해지고, 행복이 있었던 그 자리엔 어느새 나빴던 기억이 자리를 꿰차고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그럴 땐 내 인생엔 행복이라는 게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다. 우리는 좋은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항상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 누군가와 함께 했던 따뜻했던 순간, 내가 무언가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냈을 때의 성취감, 예쁜 것을 보거나 맛있는 걸 먹었을 때 마음을 꽉 채웠던 만족감. 며칠만 지나면 잊힐 그 순간들을 꼭 붙잡고 그로부터 오는 힘으로 내 인생을 채우다 보면 그런 날들이 또 다시 오기 마련이다. 그걸 잊지 않기 위해 난 엽서를 사고 벽에 하나하나 붙인다. 비가 온 뒤엔 행복하게 엽서를 샀던 그때처럼 다시 날이 갤 수 있기를 바라며."

2020.05 완두콩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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